오일도( 경북 영양, 1901-1946)
아래는 최종철 기자의 글입니다.
[ '작은 방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하늘 저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놀!/ 이 우 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이 시는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마을앞 도로변에 세워진 일도(본명.오병희) 시인의 시비에 새겨진 '저녁놀'이란 작품이다.
오일도의 고향마을인 이곳 감천리는 안동에서 승용차를 타고 영덕방면으로 30분쯤 지나면 청송군 진보읍이 나오고, 여기에서 영양군청 소재지를 향해 10분쯤 들어가면 왼쪽 언덕기슭에 70여호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다.
마을앞으로는 일월산에서 시작돼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반변천이 보인다. 반변천은 물이 맑아 붕어는 물론 꺽지 텅거리 등 다른 지역 하천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매운탕용 물고기들이 우글거린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고기반찬을 사먹는 대신 저녁만 되면 파리낚시나 그물을 냇물에 쳐 두었다가 아침에 걷어올린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먹는다는 것이다. 애주가였던 일도는 이곳 강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매일 매운탕과 술로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랜 것으로 전해진다.
감천이란 마을지명은 옛날부터 이곳의 물이 워낙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단맛이 돌 정도로 물맛이 좋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우측으로는 무지개산이 아름다운 자태로 걸쳐 있고, 반변천에는 그림자를 드리운 병암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또 반변천에 내리꽂힌 병암산 절벽에는 천연기념물 114호로 지정된 측백 수림이 자생하고 있어 일도가 해질 무렵 이를 배경으로 한 저녁놀을 바라보고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고 감탄하며 '붉은 꿈나라'로 가려는 황홀경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이처럼 한가하고 아름다운 농촌마을에도 산업화와 상업화의 물결이 밀려와 예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7~8년전 동네옆에 대규모 양어장이 설치되고 횟집이 들어서 마을의 식수가 오염되는 바람에 감천의 물맛이 좋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는 게 마을주민의 얘기다.
또 대부분의 다른 농촌지역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60대 이상의 노인들만이 힘겹게 농사를 짓고 있는 썰렁한 모습이다.
오일도 생존 당시만 해도 이 마을 가구수가 1백30여호에 달해 자연부락으로는 영양군내에서 가장 큰 부락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든 셈이다. 영양군청소재지는 이 마을에서 5km 가량 더 들어가야 한다.
일도의 생가는 마을 한복판에 연건평만도 99평에 달할 정도의 대궐같은 집이다. 지은 지 오래돼 지붕의 기와가 허물어져 곳곳에 비가 새는 등 보수가 시급하지만 싸리나무와 주목으로 지은 단단하고 웅장한 건물 골격은 아직도 옛날의 부와 영화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이 집은 현재 오일도의 12촌인 증호옹(76)이 마을 어린이들에게 한문과 서예를 가르치며 관리하고 있다. 증호옹은 일도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자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릴 때 일도가 동네 어린이들을 특히 귀여워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일도가 서울생활에 좌절을 느끼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뒤 쓴 '고과정기'란 글에서 '동쪽 울타리에 누른 호박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고, 서편 지붕위에는 흰 박꽃이 오르려고 너울거리고, 처마끝에 제비 재잘거리고, 대추나무 깊은 그늘에는 꾀꼬리와 매암이와 벌의 교향악이 조금도 쉴 새 없이 마을을 흔들고, 앞 삽짝으로 한 조각 남쪽 하늘이 터져 진보 비향산이 멀리 보인다. 놀은 붉고 구름은 희다. 예의 코스모스도 금년에도 잊지 않고 여기저기 가득 심었는데 아직 철 일찍으나 차차 꽃피기 시작하면 내 정원의 한 사랑이 될 것이다'며 유유자적함을 보였다.
그리고 이 당시 또 안채 모서리방 창앞에 포도나무를 심어놓고 '누른 포도잎' 이란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원과 집앞에는 몇 그루의 나무만 서 있을 뿐 옛날의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일도 오병희는 영양이 낳은 근대시인 가운데 최초의 사람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인근 석보 출신의 이병각(1911~41)이 시와 비평을 통하여 문단의 관심을 모았고, 또 일월에는 천재시인 세림 조동진(1917~37)이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요절하고 그 뒤를 이어 세림의 아우인 조지훈(192 0~68)의 출현으로 영양은 한국의 근대 문학의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 게 된다.
이처럼 한국 근대문학을 이끌어가던 시기의 영양을 대표하고 그 맏형의 자리를 한 사람이 바로 오일도이다.
아버지 낙안 오씨 익체와 어머니 의흥안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난 일도는 열세살 때까지 집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열네살 때 조지훈의 집안으로 장가를 든 뒤 영양공립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21세때 도일, 입 교대학 철학부를 졸업할 정도로 비교적 유복하고 평탄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는 일도의 집안이 대대로 이 지방에선 이름난 천석거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관리인 증호옹이 설명한다. 증호옹의 어릴 때 기억으로는 일도의 집에는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볏가리가 마당에 높이 쌓였고 수십명의 일꾼들과 우마차가 들락거려 시끌벅적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1934년 일도는 형의 도움으로 사재를 털어 서울에서 '시원' 이란 잡지를 발간, 10여년간 부정기적으로 5호까지 냈으나, 원고난과 재정난으로 결국 문을 닫고 낙향하게 된다.
시원지를 운영하면서 일도는 요절한 조지훈의 형 세림의 시집인 '세림시집'과 '을해명시선집'을 출간했다. 일도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도농에 안장돼 있다.
아래는 정형기 기자의 글입니다.
[천연기념물 제114호 감천측백수림과 항일 시인 오일도 선생의 생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는 낙안 오씨들이 400년을 살아온 문향 마을이다.
처음에는 지곡(地谷)이라 불리다가 중국 주자(朱子)의 무이운곡(武夷雲谷)과 지형이 닮았다고 해 운곡(雲谷)이라 불려 조선 정조 5년 '운곡영당(雲谷影堂)'을 건립하기도 했으며, 그 후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吳時俊) 선생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동곡(東谷)이라 개명했고, 후일 마을 뒷산인 무이산(武夷山)에서 발원한 계곡에 맑은 물이 솟고 마을 앞으로는 일월산(日月山)동쪽에서 발원해 흐르는 반변천이 있어서 감천(感天)이라 불리게 됐다는 유래와 땅을 다스리는 물신이 있는 마을이라서 감천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인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번지 오일도 생가는 애국시인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1901~1946)이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그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조선 고종(高宗) 1년(1864)에 건축했다.
이 집은 크게는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돼 있으며,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자형 뜰집'이고 대문채는 '一'자형으로 조선후기 경북 북부지방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살림집 형태를 갖추고 있다.
현재 생가에는 후손인 오증호씨가 살고 있으며, 생가 앞 하천절벽에는 영양의 관동팔경 중 하나로 천연기념물 제 114호인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이 곳에는 오일도 선생의 시비가 소공원과 함께 세워져 있는데 '저녁놀'이라는 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어 관광객들이 명시를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측백수림 군락. 반변천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오일도 선생은 본명은 희병(熙秉)이요 일도(一島)는 아호(雅號)이다.
오시준 칠원현감(吳時俊 漆原 縣監)의 10세손이며 오익휴(吳益休) 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901년(光武 5년) 영양면 감천동(甘川洞)에서 태어나 8세에 사숙(私淑)에서 6년간 한문을 수학할 때에 비범한 재질이라 성적이 우수했으며, 1915년 3월 16세의 나이로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한 학년을 건너뛰어 1918년에 4학년을 졸업하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응시, 입학했다.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朝鮮文壇) 4월호에 처녀작 '한가람 백사장(白沙場)에서'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1935년 월 사재(私財)를 기울여 최초의 시 전문지인 시원(詩苑)을 창간해 5호까지 발간, 시 문학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이를 통해 조지훈 등 영양지역 후배 문인들을 이끌어 내며 한국 현대 시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오일도 시인의 고매한 정신과 올곧은 절개는 끝내 변함이 없었다. 왜정 말기에 조선문인들 대다수가 회유 또는 억압당함으로써 왜정에 부동하는 친일문인으로 변조됐으니, 그들중엔 마치 갈보와 같이 교태를 부리며 무문곡필을 농간해 일본제국주의에 아부하는 요사스러운 문인도 있었건만, 해방후 1966년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오일도 시인의 이름은 그림자조차 없으니 이역만리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왜추(矮醜)앞에 굴종(屈從)하지 않은 절개있는 선비이기도 하다.
8·15 직후 구국의 뜻을 품은 선생은 민족 민주 진영인 한국민주당에 입당했으나 이듬해인 1946년에 간경화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2월 28일 맏아들의 가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46세의 애석한 나이였다.
영양의 측백나무 자생지는 영양읍 감천 1리 마을 앞을 끼고 도는 반변천 건너편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도도히 흐르는 반변천 물줄기를 바라보며 붙어 있는 측백수림은 흡사 병풍과 같아 맑은 날 물 위에 비추는 그림자는 신선이 노니는 곳이 따로 없는 것 같으며, 무엇보다도 석벽에 착생해 병풍처럼 늘어선 측백나무들은 식물학상 희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측백나무 수림은 약 30m 높이의 기암 절벽 위에 형성돼 있는데, 반변천 건너편에서 보아도 잎이 신선해 보일 정도로 생육이 좋고 일반적 나지에서 자라는 나무들보다 크지는 않으나 생장 역시 좋은 편이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 영양 감천의 절벽에서만 자란다는 신비로운 측백수의 잎을 삶아 먹으면 부인병, 대하증 등에 효능이 뛰어나며, 오장육부를 이롭게 하는 신비의 장수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구하기 위해 멀리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며, 감천마을의 한 착한 젊은이가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수 십m의 낭떠러지 위 측백나무 가지를 자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올라가 나무를 꺽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절벽 위 측백수림은 영양의 관동팔경 중 하나로 불리우며, 오일도 선생의 생가가 있는 감천마을은 생가를 중심으로 낙동강 상류 하천인 반변천의 물줄기가 굽이 돌아 흐르기 때문에 물줄기를 상공에서 바라보면 한반도, 즉 우리나라 지도를 닮은 형상을 하고 있다.
감천마을의 자연을 걸으면 도시에서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모두 잊어버릴 수 있고 오일도 선생의 항일 정신을 느낄 수 있어 새삼 나라에 대한 소중함과 자기를 찾아가는 자아성찰의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라고 박원양 영양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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