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옥(1760년-1816년, 경기도 화성)

톰소여와허크 2014. 3. 7. 13:08

이옥(1760년-1816년, 경기도 화성)

 

아래는 정출헌의 글입니다.

[ 1818년 어떤 젊은이가 어지럽게 쓴 원고 뭉치를 들고 한 노인을 찾았다. 자기 부친이 남긴 유고의 교열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노인에게는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젊은 시절, 틈틈이 지은 벗의 글이었다. 원고를 뒤적이다가 문득 그가 죽고 없음을 깨닫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하여 벗이 남긴 글을 정갈하게 옮겨 적은 뒤 이듬해 오월 단오 작은 문집으로 엮었다. 어지럽게 쓴 원고만 남긴 채 죽어간 벗은 “나는 요즘 세상의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선진양한(先秦兩漢)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위진삼당(魏晉三唐)에 무어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라고 자부하던 이옥(李鈺)이란 인물이다. 그런 벗의 유고를 눈물로 갈무리한 인물은 김려(金鑢)이다.

  정약용과 박지원 같은 최고의 지성들이 활동하던 정조 때, 그들은 또 다른 빛깔로 문단을 수놓은 문학적 동반자였다. 이옥과 김려는 살아서 절친한 글벗이었고 죽어서도 이토록 각별한 글벗으로 남았다. 그들은 ‘우정의 라이벌’이다.

 

이옥은 참으로 문제적 인물이다. 자신은 지금 사람이니 선진양한이나 위진삼당의 글에 구애 받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직감할 수 있다. ‘문장은 반드시 선진양한을 본받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는 말은 당시 불변의 진리에 가까웠다.

  그런 글쓰기야말로 진정한 문장, 곧 고문(古文)에 이르는 왕도라 여기던 때이다. 그런데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자신은 ‘과거/거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별을 선언했으니 참으로 당차다. 그렇지만 그런 당찬 글쓰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성균관에 입학해 꿈을 키워가던 젊은 이옥은 정조의 명으로 글 한 편을 짓게 됐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정조가 보기에 이옥은 순정(純正)한 글쓰기가 아니라 경박한 소설식 문체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는 그런 문체를 쓰지 말도록 경고했지만 이옥은 고치지 않았다.

매일 10편씩 열흘 동안 시를 지어 바치라는 과제를 주기도 하고,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해 보기도 하고, 경상도 삼가현(三嘉縣ㆍ지금의 경남 합천 지역)에서 충군(充軍ㆍ범죄자에게 내리는 군역)하는 엄벌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옥은 자신의 글쓰기를 고집했다.

 사소한 문체에 끊임없이 시비를 건 정조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임금의 명령을 끝내 따르지 않은 이옥도 납득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정조와 이옥의 이런 대립은 조선후기 문학사의 큰 사건인 문체반정(文體反正) 사례 가운데 하나다. 경박한 문체를 순정하게 바꾸려는 정조의 시도는 박지원, 남공철, 김조순 등 당대 일류급 문사들도 곤욕에 빠뜨렸다.

  거기에는 노론과 남인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있지만 성리학적 질서와 사유 체계를 위협하는 뿌리를 제거하려던 노회한 정조의 고육지책이 담겨 있다. 양명학, 서학과 같은 이단 사상이라든가 고증학, 자연과학과 같은 학문 방법론이 위기의 주범이라고 본 정조는 그것이 명말청초에 풍미하던 소설식 문체에 실려 들어왔다고 판단했다.

 

김려는 그런 이옥을 눈물로 추억하고 그가 추구한 글쓰기를 적극 옹호했다. 물론 김려 역시 16세에 ‘김려체’로 불리는 문체를 유행시켰던 탁월한 문인이었다. 서계(庶系)이자 세력을 잃은 소북(小北)에 속한 이옥과 교유하긴 했지만 그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한 노론(老論)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옥이 문체 때문에 쫓겨나 지방을 전전하고 있을 즈음, 김려 역시 친하게 지내던 글벗과 나눈 비어사건(飛語事件)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다. 복잡한 사건이라 몇 마디로 간략하게 정리하기 힘들지만, 어떤 섬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는 죄목이었다. 10년의 유배생활은 혹독했다.

  하지만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자신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젊은 시절과 벗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벗들의 문학적 실천을 열렬하게 변호했고 자신과 문학적으로 교류한 이옥, 김조순, 이노원, 이안중 등 10여 명의 글을 ‘담정총서(潭庭叢書)’로 엮어내기도 했다. 김려는 이옥의 미더운 동반자이자 변함없는 후원자였다.

이옥과 김려는 한평생 고집한 글쓰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던 것일까? 많은 작품이 유실됐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글쓰기 방향과 진정성을 읽어내기는 남아 있는 작품으로 충분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당시 사대부가 문장을 통해 구축해 놓은 세계상을 전복하고자 했다.

전통의 사대부가 다루는 문제란 국가와 정치, 우주와 성명(性命) 같은 거대담론이 대부분이다. 문장이란 도(道)를 전하는 도구라는 재도론(載道論)은 이런 문학관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옥과 김려는 그런 불변의, 또는 규범적인 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천지만물이란 만 가지 물건이니 진실로 하나로 합할 수 없거니와, 하나의 하늘이라 해도 하루도 서로 같은 하늘이 없고, 하나의 땅이라 해도 한 곳도 서로 같은 땅이 없다”는 이옥의 말은 그런 세계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천지만물을 자신의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문학적 사명으로 삼았다. 인간을 다루더라도 남들이 돌보지 않는 소외된 인간에 주목하고, 세계를 다루더라도 관념이 된 자연이 아니라 구체적 사물에 주목했다. 인정물태(人情物態)에 대한 곡진한 묘사는 그들이 추구한 글쓰기의 요체였다.

  그들이 다룬 인물이 대부분 포수, 의원, 거지, 도둑, 장사꾼, 병졸, 기생과 같은 미천한 부류라든가 그들이 포착한 사물이 개구리, 벌레, 물고기, 봉선화, 거미, 벼룩, 나비, 나귀와 같은 미물인 데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이런 자질구레한 것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소재 면에서 이미 탈중심적인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었다. 무엇을 소재로 선택하는가에 따라 글의 주제, 격식, 문체, 어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관건은 자신이 선택한 그런 소재를 얼마나 핍진하고 진실되게 그려낼 수 있는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여성을 즐겨 다루었고 거기에 담긴 인간 이해가 새롭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조선 후기 문인 가운데 그들보다 여성의 정감을 빈번하고 곡진하게 그려낸 경우를 찾기 어렵다. 18세기 말 도시 여성의 다채로운 삶을 66편의 절구시(絶句詩)로 담아내고 있는 이옥의 ‘이언(俚言)’과 천한 백정 딸의 인생역정을 장편 서사시로 엮어내고 있는 김려의 ‘장원경 처 심씨를 위해 지은 시(古詩爲張遠卿妻沈氏作)’은 최고의 걸작이다.

  어떤 사람이 이옥에게 왜 여성에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비난한 적이 있다. 그때 이옥은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情)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묘한 것이 없고, 정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 없다”고 답했다.

천지만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데 남녀의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요긴한 게 없다고 했으니, 천지만물의 근원을 태극(太極)이라든가 음양(陰陽) 같은 추상에서 구하려던 중세적 사유로부터 그들은 멀리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옥과 김려가 남긴 작품을 보면 미천한 인간이라든가 미물, 나아가 고통받는 여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고 따뜻했는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지만물 가운데 인간만의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떵떵거리는 남성만의 독점적 지위는 더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과 사물, 귀한 것과 천한 것, 남성과 여성을 모두 동등한 개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평등안(平等眼)은 그들을 이런 진보적인 세계 이해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때 그들의 문제의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화두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 들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업신여기며,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불평등이 여전히 존속되는 한에서는.]

 

  아래는 누군가의 독후감을 인용한 글입니다.

[ 최근 읽은 <문체반정/김용심/보리>이라는 책에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킨 당사자인 정조대왕이고 다른 두 사람은 문체반정의 대상자로 정조대왕이 언급한 연암 박지원과 이옥李鈺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박지원과 이옥 두 사람은 문체반정이라는 정조정책에 대해 극과 극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극과극의 반응을 보인 두 사람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정조 때는 상업이 발달되면서 관영상업제도도 무너지고, 이미 공노비제도도 해체되고 사노비제도까지 유명무실화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제사까지 거부하는 천주교인 서학을 비롯하여 새로운 사조도 많이 들어 사회 구조가 변혁기를 맞이하는 때였습니다. 이런 때였으니 주자학적 사고로 무장되었고 엄청난 공부를 하여 학자를 가르친다는 군왕이었던 정조입장에서는 사회가 매우 혼란한 것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당시는 요새 말하는 <패관문학稗官文學>에서 시작된 소설류가 엄청나게 많이 읽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중국에서 엄청난 양의 소설류가 수입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이 읽혔던지 당시 학자를 키우는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학자도 규장각 안에서 소설을 읽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보니 이런 소설류의 글쓰기가 퍼져서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에도 나타나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정조는 사회기강을 “바른 글쓰기 운동”을 통해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인터넷 문투가 사회기강을 흐트러뜨리는 주범이라고 생각하여 인터넷 문투의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정조의 현실인식입니다. 저자도 지적했지만 문투 즉 문체가 변하는 것은 사회변화 때문이지 문투가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정조는 이런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체반정이 있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같은 견해입니다.(문체반정을 한 이유에 대해서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의지를 보여줄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희생양에 걸려든 것이 바로 박지원과 이옥입니다. 박지원과 이옥이 정조의 희생양이 된 과정은 차이가 있습니다. 박지원은 이미 당대에 알려진 문장가이고 이옥은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던 유생신분이라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둘 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은 분명한데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한 대처 방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선 박지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면 박지원은 청나라 견문록인 <열하일기>로 이미 세간에 잘 알려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반전>, <호질>, <허생전>과 같은 비판적인 소설을 쓴 사람이라 정조의 레이더망에 이미 포착되었을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한문을 배우지 않고 한자만을 배운 사람이니 당연히 한문이라는 문장을 써보지 않아 박지원의 문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정조의 안목으로 볼 때 문장답지 않은 문장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당시 정안현감으로 있었던 박지원을 콕 집어 비판하면서 사람을 보내 박지원에게 고문체로 글을 지어 올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지시에 대해 박지원은 ‘석고대죄한다.’는 식의 장황한 글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글을 쓰고 나서도 다른 사람처럼 고문체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지꼴리는대로 글을 계속 썼다고 합니다.

  다음 소개할 이옥은 성균관유생들에게 본보기로 하기 위해 걸린 경우입니다. 성균관에서 치른 <응제>의 글을 본 정조가 이옥의 글이 소설체로 쓰였다고 하면서 사륙문四六文만 50수를 지어 문체를 고친 후 과거에 응시하도록 지시합니다.(정조실록 16년 10월 19일 기사)

이 책에 의하면 이옥은 과거를 보기 위해 시 천편, 변려문 이백여 편, 책문 50편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륙문을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옥이 내린 벌대로 글을 써 내긴 했지만 결국 자기의 문체를 버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3년 뒤 성균관유생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서 다시 소설체 문장을 썼다가 정조에게 발각되어 군대에 들어가라는 명령(충군充軍)을 받고 군에 들어갑니다. 당시 양반들은 군대를 가지 않았으니 치욕적인 벌입니다. 충군을 마치고 다시 본 과거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체를 버리지 못해 또 충군하는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충군을 마치고 다시 본 과거에서 장원급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관들이 장원을 준 글에 대해 정조가 아직 소설체 문장이 있다고 해서 꼴찌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옥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개인 저작활동을 하게 됩니다. 벼슬도 하지 못한 이옥의 글이 남게 된 것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친구가 이옥의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옥은 정조의 명령에 항거하고 자기 문장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박지원과 이옥 두 사람 모두는 당시 문장으로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는 글을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박지원은 글에 대한 갈등을 겪는 젊은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글에 대해 뭐라 하면 “제가 널리 배우지 못하여 옛글을 미처 살피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사과하고 그럼에도 뭐라 하면 조심스럽게 “<서경>과 <시경>도 하,은,주 삼대 당시 유행하던 문장이다.”라고 말하라 했다고 합니다.(131쪽)

또한 이옥은 등잔에 쓰는 기름을 사오지 못한 아전의 예를 들면서 ‘등잔기름을 장사아치들도 모르는 법유法油라고 써준 원님이 잘못한 것이지 아전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239쪽) 즉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당시의 시류를 알고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글로서 자기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헤쳐 나가는 태도는 사뭇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적당히 임금의 말에 수긍하는 척하면서도 자기의 길을 지켰고 한사람은 철저하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예전에 제가 쓴 글에서 일제에 항거하여 싸운 사람들 대부분이 노론 중에서도 원칙론자인 이항로 계열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신채호 선생에 대한 글에서도 신채호 선생도 이항로 학맥을 이어받은 분으로 원칙을 지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매우 고단했을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그런 원칙론 때문에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했을 것이고, 성격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있다는 점에서 귀감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살던 세상은 매우 나라가 위태로워 나라를 지켜야 한다거나 또는 망한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 시대 타협이란 곧 매국이나 친일이라는 말과 같았으니 당연히 타협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런데 태평성대에는 어떨까요. 곧이곧대로 산다는 것이 어쩌면 편벽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보여 집니다.

  박지원과 이옥이 살았을 때는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조선의 르네상스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본다면 엄청난 변혁기요 혼란기였습니다. 겉으로는 태평성대였을 것이지만 내면을 보면 엄청난 혼란기였다고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잘 정리되면 흥하는 것이요, 잘못 정리되면 망하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조선은 후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영·정조시대와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먹고사는 것은 그럭저럭 해결되었지만, 좌파니 우파니 하면서 서로를 헐뜯고 있으며, 세대 간의 갈등도 심각하고, 교육의 본질에 대한 합의점도 없고, 부의 편중이 점점 심각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해소되는 것은 없고……. 지금 우리나라 전체가 혼돈의 도가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까요. 그런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박지원의 삶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타협 없이 끝가지 자신의 길을 가는 이옥의 삶이 정답일까요.

개인적으로는 박지원의 삶이 결국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는 그 시대를 읽는 자세에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그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고민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유효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