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에 대한 명상>수록작

세연정에서

톰소여와허크 2012. 9. 8. 23:39

 

 

세연정에서 / 이동훈


섬에 남을 건가 말 건가.
판석보로 내려가는 물살에 장화 목을 적시다가
낭창하니 듣는 빗발을 피해 팽나무 밑으로 간다.
무희의 발자국 지워지는 동대 서대 지나  
소나무에 기대 더워진 이마를 짚는다.
밖으로 나갈 건가 말 건가.
취하여 사는 것도 어렵지만 깨는 건 더 두렵다.
묻혀 사는 것이 답답하지만
나가는 길도 짙디짙은 안갯속이다.
세연정* 문짝을 다 걷어 올려도
바닷바람은 도포 자락을 흔들 뿐
소줏불로 타는 속을 어쩌지 못한다.
연못 바위에 훌쩍 올라 활을 잡아도
과녁은 보이지 않고
공연히 화살대만 부러뜨려 계담에 흘려보낸다.  
뭍으로 나갈 건가 말 건가.
배를 띄운들 이만한 영토가 없고
배를 저어 간들 이만한 자유가 없다지만
한 자락 스멀거리는 안개 따라
뱃머리는 자꾸 뭍으로 돌아선다.

옛사람도 배도 무희도 가락도 사라진
세연정에 이제, 안개만 살아
뭍에서 온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
뭍이든 섬이든
길 아닌 곳이 없지만 다시 길을 묻는다.
세상으로 나갈 건가 말 건가.
연 줄기를 잡은 청개구리
앞발을 놓을까 말까 궁리하는 사이
더금더금 지핀 안개가 길을 지우고
섬 속의 섬을 뽀얗게 덮는다.

*세연정(洗然亭) : 윤선도가 보길도에 지은 정원이자 정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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