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1902~1951, 경기도 연천)
다음은 고봉진 수필가의 글이다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鏞∙1902~1951년)은 1934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월파는 경기도 연천 출신으로 만 15세 되는 해인 1917년에 단신 상경해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이 나라의 최고 수재들이 들어가던 학교다. 재학 중인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그는 보성고등학교로 옮겨서 1921년에 졸업했다. 이듬해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릿교(立敎)대학교의 영문학과에 입학을 한다. 릿교대는 미국 성공회 선교사가 1874년 도쿄에서 영문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출발 한 사학(私學)이다.
그가 릿쿄대에 재학을 하고 있던 1923년 도쿄에 간토대지진(関東大震災)이 일어나 그때 현지 거주 우리동포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었다. 월파는 그 참사를 무사히 모면하고 1927년 졸업을 하자 귀국해서 모교인 보성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장남이었던 그는 곧 온 가족을 연천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해서 성북동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 이듬해 1928년부터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하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게 된다. 나이 만 32세에 이미 일가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38세에 발표한 것이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였다. 그가 떠나온 전원생활을 다시 동경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리는 노래다.
왜 사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대답을 하려 들지 않고 웃겠다는 말은 이백(李白)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백은 그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에게 무슨 이유로 벽산에 사느냐고 묻는다(問余何事棲碧山)/ 웃고 대답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저절로 한가롭다(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 가니(桃花流水杳然去)/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가 있는 것이다(別有天地非人間)”
이 시도 이름은 문답이라고 되어 있지만 역시 시인 혼자서 주고받는 자문자답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내가 왜 여기 살고자 하는지 물어보지만 구태여 말로 그 이유를 조목조목 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고 느긋하다. 이백의 탈속적인 기상이 넘쳐나는 시다.
대륙을 침공하다가 끝내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는 1943년 적성 문학이라고 전문학교 교과에서 영문학 강좌를 폐지함으로써 월파는 교단에서 축출당한다.
해방 이후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벼락 출세를 할 때 월파는 미군정에 의하여 강원도 지사로 뜻밖에 임명되었지만 며칠 만에 바로 사임을 하고 교단으로 복귀했다가 그 이듬해 미국 보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돌아온 해는 1949년 정부가 수립된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돌아오자마자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복직을 했으니 그가 노래한 시가 얼마나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인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월파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해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식중독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49세라는 아까운 나이였다. 우리 시문학에는 측량할 수 없도록 애석한 돌발사였다. 그가 남긴 시를 암송할 때마다 좀 더 오래 생존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상념에 잠기게 된다.
요즘 같이 어수선한 세상에서는 무슨 물음에나 웃고 대답하지 않는 쪽이 더 정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다음은 나태주 시인의 글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한 시절 우리나라에는 전원서정을 올곧게 다듬어 시를 빚던 전통이 있었다. 실은 김소월부터가 전원서정이고 이육사의 「청포도」도 전원서정에 물을 댄 시요, 청록파 3가시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석정, 장만영, 김동명, 박용래 같은 시인들이 여기에 보태진다.
이에 한 사람 더 추가하자만 김상용 시인이요, 작품을 말하자면 위에 적은 작품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다? 남으로 창을 내는 건 동향적 주거형태이다. 더불어 삶의 방법이다.
남쪽은 해밝은 쪽이고 비가 오는 쪽이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방위이다. 이런 데서부터 작자는 순한 삶, 자연스런 삶, 전통적인 인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밭’이다. 별로 넓은 밭이 아닌 모양이다. ‘한참갈이’라 했으니 한나절쯤 갈면 되는 모양이다. ‘괭이로 파고’ ‘호미’로는 ‘풀’을 매겠다 했다. 결코 왁자지껄한 생활이 아니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의 삶이다. 핵심은 그 다음에 나온다. ‘구름이 꼬인다’ 해도 결코 따라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의 배포다. 더불어 ‘새’의 노래는 공짜로 듣겠다고 했다. 더욱 여유로움이다.
그런 다음, 작자는 슬그머니 청유형으로 말하고 있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이 얼마나 정답고 은근한 말투인가? 삶이란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고달프다. 고달픈 삶 가운데 이런 이웃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소중한 위로이겠는가.
‘왜 사냐건/ 웃지요.’ 아, 이건 시에서 가장 격이 높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인생에 대한 대답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더 있을까? 굳이 이 시를 두고 예이츠의 시나 이백의 「산중문답」같은 시(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더러는 이 같은 시를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순응적이고 소극적인 인생관, 은둔적인 생활을 빌미로 그러지 싶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편벽(便辟)이다. 왜 이 시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다만 이 시인은 이런 인생을 선택했을 따름이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비껴가면 되는 일이 아니겠나? 남의 인생을 두고 투덜거릴 필요는 없는 일이다.
김상용(金尙鎔 1902-1950) 시인은 영문학자이기도 했다. 호는 월파(月坡). 일본에 유학했으며 돌아와 보성고보 교원을 거쳐 이화여전(오늘의 이화여대) 교수를 했다.
교수 시절, 노천명과 같은 시인의 스승이기도 했다. 시집으로 1939년에 발간한 『망향』한 권이 있는데, 위의 시는 물론 그 책에 실린 글이다. ]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1944년 8월 1일에서 8월 8일까지 주최한 <징병 축하 행사>에 참석, 김팔봉, 김용제, 노천명, 김종한, 김동환, 이하윤 등과 함께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제목으로 시를 발표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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