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1651~1708, 경기도 과천)
아래는 길진숙 님의 글입니다.
[1. 사직소 올리는 사나이!
농암 김창협의 문집(『농암집』)을 열어보면 유독 눈이 가는 글이 있다. 이름하여 사직소(辭職疏)! 즉 관직을 사양하기 위해 임금께 올리는 글이다. 무려 총 45편의 사직소가 ‘소차(疏箚: 상소문)’ 항목에 실려 있다.
이 사직소들은 농암의 나이 44살인 1694년(숙종 20년)부터 56살인 1706년(숙종 32년)까지 장장 13년 동안 올린 상소문으로, 자신의 관직임명을 거둬달라는 상소문이 38편, 형 김창집을 대신하여 올린 상소문이 7편이다. 13년 동안 거의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숙종은 관직을 제수했고, 농암은 이때마다 거절하는 상소문을 바쳤다. 농암이 1708년, 그의 나이 58살에 죽었으니 죽기 전까지 계속 관직을 임명받은 셈이다.
관직도 다채롭다. 호조참의, 좌부승지, 우부승지, 부제학, 개성부유수, 형조참판, 이조참판, 동지경연사, 부제학, 대사헌, 호조참판, 이조참판, 동지돈녕부사, 좌윤, 이조참판, 대제학, 형조판서, 대제학. 어떤 경우는 네 차례에 걸쳐 사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관직을 내리고, 사직소를 쓰는 일이 왕과 신하의 취미도 아니고, 이쯤하면 숙종도 농암도 참으로 집요하다고 할 만하다. 한편으로는 농암의 그 꺾이지 않는 결기가 놀랍기까지 하다.
농암이 사직소를 올린 행위는 산림처사들이 관직을 제수하면 으레 한 번쯤 사양하는 관례적인 절차, 혹은 형식적인 과정과는 달랐다. 보통 산림처사들은 관직을 덜컥 받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관직에 나아간다는 뜻을 천명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리고 나서야 수락하는 수순을 밟았다. 왕조실록에 왕 이상으로 출현 횟수가 많은 인물이 송시열이라는데, 그 중에 많은 부분이 사직소와 관련된 이야기다. 왕의 부름을 받았던 송시열은 진정 관직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사직소를 올렸고, 산림처사라는 위상에 걸맞기 위해서도 사직소를 올렸다. 송시열의 사직소는 그 자체가 정치 행위로 정국을 쥐락펴락했다. 『효종실록』과 『숙종실록』에는 거의 열흘에 한 번 꼴로 송시열의 사직소가 오르내렸다. 그러나 농암은 달랐다. 언제나 한결 같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서 처사로서 살아가겠노라고 왕에게 전했다. 자리의 유혹에 넘어감직도 하건만, 꿋꿋하게 청요직(淸要職)에 오르는 길을 거부했다.
2. 기사환국과 아버지의 죽음
물론 농암 김창협은 젊어서 관직에 나아갈 뜻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산림처사를 꿈꿔본 적도 없었다.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 왕을 보좌하는 직책을 맡는 것이 농암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40여 년 동안을 중앙 정계에서 몸담았던 서인의 영수요, 영의정까지 오른 김수항(1629~1689)이 아버지였으니,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서울 지역에서 권세를 떨치던 경화사족으로 그에 걸맞은 삶이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농암의 집안으로 말하자면 문벌 중의 문벌인 안동 김문이다. 증조부는 병조호란 직후의 살벌한 시기에 반청인사로 활약했던 청음 김상헌(1570년(선조 3년)~1652년(효종3년))이다. 김상헌은 주전파로 척화를 주장하다 1640년 71살의 노구로 심양에 끌려가 6년간 억류되었다가 1645년 76살에 귀환했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 또한 열혈 지사로 1637년 강도(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남문루의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농암의 아버지 김수항은 어떠한가? 산림의 맹주이자 북벌을 외치던 송시열(1607~1684)과 정치적 동맹을 맺으며 서인의 이념을 결집시켜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송시열은 서인의 적통으로서 김상헌과 산당을 결성했다. 그는 이이의 수제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스승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김집에게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런 연유로 농암과 그 형제들은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평생 동안 학문적, 정치적 동지 관계를 맺었다.
문벌과 학맥 어느 하나 빠질 게 없는데다가 농암 스스로도 일찍부터 학문과 재능으로 명망이 드높았으니, 승승장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농암은 32세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부교리, 대사성, 대사간이라는 직위에 올라 숙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그야말로 교목세신(喬木世臣)으로 맡은 바 직분에 충실했다. 말하자면 농암은 여러 대에 걸쳐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을 함께할 수 있는 신하 그 자체였다.
그랬던 농암의 삶은 중년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진다. 그 원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 그 유명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로 인해 빚어진 사건이다.
기사환국이 있기 몇 년 전부터 이미 농암 집안엔 파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686년 숙종은 나인 장씨를 총애하여 숙원으로 책봉하고 장씨가 머물 별궁을 지으면서 남몰래 공사를 진행했다. 김창협은 미색에 빠져 백성도 모르게 토목공사를 일으킨 왕을 나무라며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직언을 했고, 이 일로 숙종은 농암 집안에 대해 유감을 가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 숙종은 장씨 집안과 가까웠던 조사석을 내심 정승으로 밀었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아버지 김수항은 왕과 의견이 달라 조사석을 밀지 않았다. 이 일로 위기를 직감한 김수항은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고 결국 영의정에서 영돈녕부사로 체직된다. 물론 김수항의 체직은 표면상 정승 임용으로 빚어진 가벼운 갈등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들 김창협의 상소로 심기가 불편했던 숙종의 화풀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농암 집안에 핵폭풍을 몰고 온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숙종의 나이 30살, 1688년에 장씨가 아들 균(경종)을 낳았다. 숙종은 너무 기쁜 나머지 후궁 소생이지만 원자로서의 명호를 정해주려 했다, 이에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서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 송시열의 상소문을 기화로 거의 1년여에 걸쳐 전, 현직 관료와 재야 유림을 막론하고 100여명 이상의 서인이 처벌되었다. 이 사건이 1689년의 기사환국이다. 83살의 송시열은 위리안치라는 처벌을 받고 제주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 뒤 숙종은 투기죄를 씌워 민비를 폐출하라 명했고, 남인과 서인이 모두 반대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박태보가 간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송시열은 식음을 전폐했고, 정읍에 이르러 사사의 명을 받들어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농암 36살에 아버지 김수항은 진도에 유배된 뒤 사사되고 작은아버지 김수흥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큰아버지 김수증은 화천 곡운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에게 '원자'의 명을 주려하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했고, 이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많은 서인들이 처벌당했다. 기사년(己巳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주도권은 남인으로 넘어가게 된다.
농암은 아버지가 사사된 이유가 형과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임금의 은총과 세상의 명망에 취해 자제할 줄 몰라 화를 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인끈을 매고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기로 다짐했다. 왕에게 올린 간언이 집안에 재앙을 불러왔다고 여긴 농암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마음 아파하며, 경기도 영평(현재 포천)의 시골에 물러나 살았다.
“선친께서 조정에서 40년 동안 벼슬하며 임금을 섬기고, 몸가짐을 갖는 방도와 우국 봉공(憂國奉公)하는 충절은 모두 처음과 끝이 있어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심(小心)하고 근신(謹愼)하여 권위(權位)로써 자처하지 않았고 겸공(謙恭)하고 외약(畏約)하여 시종이 한결같게 하였으니, 그 귀신의 시기함과 인도의 재화에 있어서 결코 스스로 그것을 초래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신의 형제가 한 가지 품행과 재능도 없으면서 서로 이어서 조정에 벼슬하여 갑자기 하대부(下大夫)의 반열에 올라서 임금의 은총이 대단하여 세상의 지목하는 바 되었는데, 신 등이 부승(負乘)의 경계와 지족(止足)의 훈계를 생각하지 않은 채 앞뒤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전진하여 지극히 왕성한 기세를 타고 자제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가득찬 재앙으로 하여금 유독 선친에게만 미치게 하고 신은 요행으로 면하였으니, 신은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부끄럽고 원통하여 피땀과 눈물이 함께 흘러내립니다. 영원히 농사꾼이 되어 이 세상을 마치고, 다시는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만일 갓끈을 치렁거리고 인끈을 매고서 당세에 분주하게 돌아다닌다면 이는 장차 어질고 효성스러운 군자(君子)에게 거듭 죄를 얻게 될 것이며, 지하(地下)에서 신의 아비를 뵈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김창협/김창집, 「아버지 김수항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 『숙종실록』, 1694년 5월 5일
3. 아버지의 유언, 현요직에 오르지 마라
기사환국이 일어난 지 5년 뒤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이 노론 측의 김춘택과 소론 측의 한중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남인의 득세를 못마땅해 하던 숙종은 이들의 힘을 빌어 남인을 축출했고, 그 결과 소론이 정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것이 1694년의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처벌당한 서인들이 신원되면서 아버지 김수항의 복작(復爵)도 이루어진다. 숙종은 서인들의 신원에 그치지 않고 명망이 높았던 김창협과 이여를 불러들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그러나 농암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다.
“신의 망부(亡父)가 임종 시에 유훈(遺訓) 한 장을 손수 써서 신의 형제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는 평소 재주와 덕이 없이 한갓 선대의 음덕에만 의지하여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아서 분수에 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재앙을 자초하였다. 오늘의 일은 모두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칠 줄 모르다가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이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내 자손들은 나를 본보기로 삼아 항상 겸손한 뜻을 품어 집에서는 공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벼슬할 때에는 현요직(顯要職)을 피함으로써 몸을 편안히 하고 집안을 보존하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의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 유훈을 받아 고이 간직하여 감히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의 아비의 속마음은 ‘가득 찬 복은 천도(天道)가 덜어 내기 마련이고, 큰 세력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이 시기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책임이 중하면 거기에 맞추기 어려워 허물이 생기고, 명망이 높으면 거기에 부응하기 어려워 비방이 돌아온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는 예로부터 누구나 우려해 온 것으로서 자신은 불행히 이미 이러한 허물에 걸려들었지만 후손들은 더 이상 위험한 처지에 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에 대해 간곡히 경계했던 것이니, 그 말이 지극히 간절하고 그 뜻이 매우 슬픕니다. 이는 후손들이 심장과 뼛속에 아로새겨 영원히 준수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신의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김창협, 「부제학을 사직하는 세 번째 소」, 『농암집』, 1694년
농암의 아버지 김수항이 죽으면서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은 “현요직을 피하여 몸을 편안히 하고 집안을 보존하라”는 말이 전부였다. 김수항의 유언은 예상 밖이다. 우리가 기대한 바와 다르게 대부의 반열에 올라 가문의 영화를 회복하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오직 몸이 편한 길을 가라고 당부했을 뿐,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었다. 농암 또한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아서 새길 따름이었다. “가득찬 복은 천도가 덜어내고, 큰 세력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이 시기하며, 중한 책임은 허물을 만들고, 높은 명망은 비방을 불러온다.” 아버지의 마음은 필시 노자의 잠언과 다르지 않았을 터, 농암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었다.
농암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기사환국이 일어난 후부터 죽을 때까지 경기도 영평의 시골에 은거했고, 이후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에서 아우 삼연 김창흡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기르다 그 근처 삼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동생들도 마찬가지로 관직 길에 오르지 않고 시골에 은거함으로써 아버지의 유계를 지켰다. 김수항은 아들 6명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 6명이 모두 학식과 문재로 당대를 주름잡았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1722),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 1662~1713),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 1666~1683). 이 중에서도 농암과 의기투합했던 아우 삼연은 21살에 과거를 단념하고 평생 처사로 살았다. 학문의 경향도 자유로웠으며, 자유자재로 팔도를 주유했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노장과 불교에 심취했고, 죽는 순간에도 삼교를 회통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했다. 형제가 모두 관직에 오르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재능을 아끼는 사람들의 의리에 미안한 일이라 여겨 큰 형 김창집만은 예외로 했다. 김창집은 청현직에 오르는 일은 되도록 삼갔지만 왕이 부르면 벼슬길에 올랐다. 역시 아버지 김수항은 앞을 내다보았던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면서 신임사화(1721~1722, 신축과 임인년에 일어난 사화)가 야기된다.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는데, 이에 반대한 소론은 목호룡을 내세워 고변을 하게 된다. 고변인 즉 노론이 세자시절의 경종을 독살하려했다는 것이다. 이 고변의 결과 노론 사대신 즉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는 참살되는 변을 면할 수 없었다.
김창협과 김창흡은 갑신환국으로 서인이 복권되었을 때도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소론 남구만에게 신원을 분명치 않게 하고, 암암리에 장희빈 세력을 등에 업고 노론을 재앙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거침없이 비판한 바 있다. 1708년 농암은 죽었고, 삼연은 형 김창집이 사사되기 전인 1722년 2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영의정’이라는 현요직에 올랐던 김창집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몸을 지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4. 백수 선비의 자유와 평안
중년의 농암은 관리가 아닌 백수 선비로서 삶을 만끽했다. 「동음대」라는 작품을 통해 농암은 백수 선비에게 보내는 세상 사람들의 염려와 조소를 가볍게 물리친다.
영가자(永嘉子)가 동음(洞陰)의 산에 거처를 정한 뒤에 그의 집에 들러 위로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그대는 참 괴롭겠네. 그대는 어려서 대대로 벼슬해 온 도성 안의 집안에서 자랐으니, 비록 그대 자신이 벼슬길에 올라 관복을 입는 영광을 누려 보진 못했어도 실로 고량진미를 배불리 먹고 비단옷을 껴입으며, 거처는 안락한 즐거움이 있고 출입할 때에는 유유자적 한가로운 즐거움이 있어 점차 부귀에 무젖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네. 그런데 지금은 하루아침에 초가집에서 명아주 잎이나 콩잎처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으며 가난하게 지내면서 처자는 초췌하고 종은 굶주린 기색이 있으니, 매우 고달프겠네. 게다가 이곳은 깊은 산속이라 인적은 없고 호랑이와 표범이 울부짖고 곰들이 오가는 곳인데 그대가 이곳에 거처하다니, 나는 내심 그대가 걱정스럽네. 아무리 그대라 해도 이러한 생활 속에서 어찌 원망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내 장차 그대가 이곳에 오래도록 안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네.”
지나가는 객은 인적 없는 산속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영가자를 비웃는다. 객은 영가자가 굶주려 고달프고, 맹수의 출몰이 걱정되어 오래도록 안주하지는 못할 것이라 장담한다. 그리고 묻는다. 원망하고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농암의 대변자 영가자는 담담하게 반박한다.
“제가 비록 고깃국 먹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긴 하였으나 본성이 담박하여 일찍이 한 번도 부귀한 모양을 익히거나 권세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자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미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길에 나갈 생각이 사라지고 세상일을 사절한 채 스스로 깊은 산속 험한 바위 속에 숨어 살고 있으니, 가난하여 굶주리는 일과 세속적인 즐거움이 없이 지내는 것은 바로 스스로 구한 것입니다. 스스로 구하고 나서 또 따라서 원망하고 후회한다면, 이 어찌 목욕하는 자가 물기를 싫어하고 불 쬐는 자가 열기를 싫어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우둔하다고는 하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려서부터 한가로이 지내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 소요부(邵堯夫)가 백원(百源)에서 정좌(靜坐)했던 일을 사모하여 배우고 싶어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 와서는 실로 학문의 뜻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부지런히 연마할 수 있을 만큼 지대가 깊고 맑은 것을 좋아하여, 이미 조그만 집을 짓고 육예(六藝)의 서적을 가득 쌓아 두고서 밤낮으로 읊으며 성인의 유지(遺旨)를 구하고, 여가에는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으며 성정을 노래하고, 그마저 싫증이 나면 또 높은 곳에 올라 깊은 계곡을 굽어보며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과 변화무쌍한 구름과 오고가는 물고기나 새와 짐승을 구경하면서 마음에 맞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 또한 즐거워서 죽음조차도 잊기에 충분한데, 어찌 편안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로 인한 두려움이 혹 있기는 하나 세상에는 이보다 더 두려운 것들이 많으니, 이것들 때문에 근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김창협, 「동음대(洞陰對)」, 『농암집』
농암은 관직에 대한 미련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산 속의 맹수보다 세상에 더 두려운 것이 많단다. 부귀영화가 화를 부려온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농암은 그 빈번한 숙종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매우 자발적으로, 아주 능동적으로 정치에의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그리고는 권세와 이익이라는 목적을 벗어나 자유롭게 공부를 즐기고 성인의 삶을 실천했으며, 변화무쌍한 자연의 흐름과 하나되어 죽음조차 잊었다. 관직을 버리자 새로운 세계가 찾아오고, 새로운 즐거움으로 매일매일이 충만하다. 그 때문에 좌절감이나 소외감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쓸데없는 한탄이 농암의 이 충만한 생활 속엔 끼어들 틈이 없다. 농암은 그렇게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향해 걸어갔다.
노론의 후예들이 농암과 삼연을 뒤따랐다. 연암 박지원의 장인 이보천과 처숙부 이양천, 김창집의 손자 김원행과 김용행, 김윤겸, 그리고 홍대용, 박지원 등은 농암과 삼연의 뒤를 이어 처사로서 살아갔다. 어떤 결핍감도 느끼지 않은 채 벼슬하지 않는 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개척했다. 이것만으로도 18세기 노론 지성의 메카는 농암 김창협임에 틀림없다. ]
아래는 진재교 님의 글입니다.
[조선조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닦았다. 이를 수기修己라 한다.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배운 바를 정치 공간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를 치인治人이라 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은 『대학大學』이 제시한 사대부의 이상적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선조 사대부 역시 수기치인의 실현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삶은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이를 실현하고자 한 맑은 영혼의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다.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어 보니, 지금 역병疫病의 참상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지경인데도, 조정에서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조차 전혀 없다고들 하며 질책을 심하게 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해 보면, 지금의 이러한 상황은 비록 힘쓸 도리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대로 수수방관해서야 되겠습니까. 온 나라 팔도의 수 천 리나 되는 길바닥에 시체가 쌓여 있는 지금 상황은 예전의 굶주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환곡還穀을 거두고 장정을 뽑아 가는 일이 여느 해와 다름이 없으니, 민심이 이 같은 지경인 것을 어찌 괴이하다 하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특별히 은명恩命을 내리시고, 백성의 부담을 다소 완화하도록 조치한다면 그나마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지방 수령들에게만 내맡겨 그들에게 중간에서 선처하도록 할 뿐이라면 은덕을 베푸는 조정의 뜻이 백성에게 분명히 전달되지 못할 것이니, 부디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여북계이공與北溪李公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 1708)이 고종형 이세백李世白에게 보낸 편지다. 이세백은 내외직을 두루 거쳐 좌의정에 이른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다. 김창협은 부친인 김수항이 정쟁으로 사망하자, 이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문학과 학자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 이름을 높였다. 그런 김창협이 중앙의 요직에 있던 고종 형에게 전염병으로 도탄에 빠져있던 백성들의 삶과 민심의 수습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고 있는데도, 조정의 중신이나 지방의 목민관 등, 어느 누구도 민생을 위한 대책조차 세우지 않은 현실을 진단한다. 목민관은 현실이 이러한데도 그저 빌려 준 환곡이나 거두고, 장정을 징집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일처리로 민심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음을 비판한 다음, 중앙의 요직에 있는 고종 형이 직접 나서 목민관의 행태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바로잡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김창협은 당시 이세백보다 16살이나 적었지만, 고종 형에게 선비다운 정신과 곧은 말로 사대부의 정치적 이상을 잃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세백 역시 나이 어린 동생의 충고를 받아들일 만큼의 국량을 지녔고, 평생 진정한 사대부의 자세를 놓지 않았기에 동생으로부터 이러한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김창협은 현실 정치의 폭력성과 정치적 이상 추구와의 괴리를 경험한 뒤로, 평생 학자의 길을 추구하며 살았다. 조정에서 높은 관직으로 그를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창협은 선비로서의 맑은 영혼을 지키기 위하여, 생활과 학문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가 노비를 한 인간으로 생각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이었다.
“여종인 의義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견딜 수 없이 참담하고 가슴이 저민다네. 그의 근면과 노고, 충성스러움과 순종함은 나라의 충신과도 견줄 만 했는데, 노고에 대한 보답을 채 하기도 전에, 갑자기 역병에 걸려 죽고 말았네. 더욱이 그녀의 시신마저도 뜻대로 염습조차 하지 못했을 터, 내 마음도 이처럼 슬픔을 잊기 어려운데, 더군다나 자네 마음은 어떻겠는가.” ― 여경명與敬明
아우인 김창집金昌緝에게 보낸 편지다. 아우의 여종이 죽자 여종을 위해 가슴 아파하는 마음가짐도 주목할 만하지만, 여종의 죽음에 슬퍼하는 아우에게 편지로 위로하는 모습 역시 너무나 살갑다. 당시 사대부는 노비를 한 인간으로 인식하여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 여종을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가문의 재산의 일부로 여겼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김창협이 여종을 생각하는 마음과 그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정감은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흔히 유학에서 위정자는 백성을 무겁게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이념을 내세워 중민重民과 애민愛民을 주장한다. 또한 백성은 한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므로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전근대 사회에서 백성은 조세와 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성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나라가 백성을 돌보는 것은 위정자를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백성 본위의 생각은 유학을 신봉하는 나라인 한 나라가 끝날 때까지 이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김시습이 “나라는 백성의 나라이다.”라 하여 백성의 정치적 위상을 강조한 것도 논리적으로는 그럴 법하다. 하지만 민본은 논리와 생각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제 사대부들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대부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노비는 물론 백성들조차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생활에서 김창협이 보여준 민본의 마음과 이상 정치를 위한 맑은 마음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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