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보다 못이 많았다 / 박준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범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감상- “옷보다 못이 많았다”는 한 구절로 고단한 삶의 단면을 환기시키는 힘이 느껴지는 시다. 이사를 나가거나 들어갈 때 그럴듯한 가구 하나 없는 가난일수록 낡은 벽지 아니면 시멘트가 드러난 맨벽에 못은 왜 그리 수두룩이 박혀 있는지…….
가난한 이웃의 이삿짐을 날라다 주는 화자 역시, 윤달이라서 돈을 굳힌 걸 안도하며 셋방의 월세를 걱정하는 처지다. 시인은 특별히 꾸미지 않으면서 한두 장면으로 가난을 드러낼 줄 안다. 시인 혹은 화자를 둘러싼 세계는 “비가 쏟고 오방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에서 보듯 절망적이다. 화자는 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또한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로 인해 괴로운 생각이 얼마간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걱정이 많으면 야위고 생각이 많으면 가난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가난해야 비로소 존재의 실존을 각성하게 된다. 쓰임도 없이 튀어나온 못처럼 화자의 존재는 쓸쓸해 보이지만, 고개를 돌리면 크고 작은 못들이 저마다의 고독과 궁상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못의 보이지 않는 절반은 어딘가 깊이 박혀 있을 것임을 생각한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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