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떠나다 / 조현석

톰소여와허크 2013. 4. 21. 17:23

떠나다 / 조현석

 

예전부터 떠남이 만든 나의

이미 만들어진 길은

흉측하기 이를 데 없다

어둔 길을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들

언제 불붙었는지…또 언제 꺼졌는지

듬성듬성 몸 전체 새집처럼 구멍 나고

 

무너진 황토 담벼락 아래 눈가 훔치는

아낙네 하나 우두커니 쪼그려 앉았는데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혹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 같은

 

끊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다 결국 끊어지고 마는 꿈…길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이미 떠나버린 몸과 마음

살았던 만큼 자잘하고 굴곡 많은

희미한 손금 같은 길들

 

더 낮아진 담벼락 아래로

떠났던 새들처럼 저녁이면 돌아오는

내 그림자, 언덕배기 힘들여 오르고

어느새 빈집 허물어지고

어머니, 흑백 꿈에도 나타나지 않고

 

예전부터 만들어진 나의 길은

더 울퉁불퉁하기만 하고 길을 따라

늘어선 숯처럼 검은 미루나무

위에 앉은 검은 새들은

이 황혼에 길을 떠난다, 너무 이른가

- <울다, 염소>, 한국문연, 2009.

 

*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 건 이제 새로울 게 없지만 이보다 더 적실한 비유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길에서 태어나 길을 걷다가 길에서 끝나는 삶. 그래서 어떤 이는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을, 길을 더 많이 걸어서 인생을 더 많이 아는 데 두기도 한다. 길이 왜 나에게만 이리 팍팍한 건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위로가 될 만한 기준이다.

   화자의 길도 순탄치 않아 보인다. 시의 모티브가 되는 꿈길에 화자의 과거 경험과 현재 상태가 어떤 식으로든 투사되고 있을 텐데, “검은 미루나무”와 “검은 새”의 이미지가 이를 대변한다. 미루나무는 줄지어 어딘가를 향하지만 제자리를 뜨지 못하고, 저녁이면 돌아오는 것도 ‘나’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다. 떠나든 남든, 남든 떠나든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 불안 속에서도 떠나야 하는 의지가 “검은 새”로 나타났을 것이다.

   꿈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것은 어머니의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온 불안과 상실감이 무의식중에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검은색은 모든 빛을 수용하는 색이기도 하다. 어둔 그늘을 드리되 그 안에 온기를 갖고 있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모 시인의 시구가 생각난다. “자잘하고 굴곡 많은”, “울퉁불퉁하기만” 길에 더 많이 끌리는 것은, 당연한, 아주 당연한 일인 줄 알겠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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