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낙비 안부 / 이덕규
전화를 걸어놓고 말이 없네
누구신가, 문득 어둑해지는 저쪽
눅눅하게 불어오는 옅은 숨소리 너머, 어디
외딴 산막 허물어져가는 흙벽에
후두둑, 듣는 빗방울 소리
툇마루 끝에 나와 앉은
하얀 맨무릎이 소나기에 대책 없이 젖듯
누가 우네
쨍쨍한 한낮
속수무책 귓속으로 들이치는 소낙비
소낙비, 뒤꼍에 널어놓고 깜박 잊어버린
고추멍석만 한 옛 기억이 젖는데
나도 모르게 덜컥 들켜버린 죄만 같아서
누구냐고 묻다가
무슨 일이냐고 달래다가 끝내
누군지도 모르는 저쪽에 대고
미안하다, 말해버렸네
누가 또 마음 단속을 잘못하였겠지
말 못 할 그 무슨 설움 같은
먹장구름이 울컥,
흐린 마음을 빠져나와 실없이 안부나 묻자고
저기, 저렇게 들판 가득 자욱이 몰려오네
- 『밥그릇 경전』, 실천문학사, 2009.
* 여기저기 미안한 일이 참 많다. 더러는 나로 인해, 더러는 너로 인해, 더러는 뭐가 뭔지도 모르게 미안한 일이 생겨 쌓인다. 미안한 감정을 빚으로 남겼다가 나중에라도 갚게 되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누가 빚을 남겼는지 빚을 떠안았는지, 그 빚이 불었는지 어땠는지 계산이 잘 서지 않는다.
화자는 전화기 저쪽에 대고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비에 젖은 “고추멍석만 한 옛 기억”과 연관되겠지만 그건 소낙비가 주는 막연한 느낌일 뿐이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라는 말이 모호하지 않고 생생하게 와 닿는다.
전화 저편에, 지나간 시간 저편에, 한때 주고받았을 말의 저편에 미안한 일이 불쑥 왔기로 뭐 대수로운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미안한 마음이 사람을 착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안부를 뒤늦게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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