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에 대한 새로운 이해 / 한혜영
겨울의 끝자락을 물고
빗발 사납게 진저리를 치는 오후
얼굴 번들거리는 중년 사내가 버스에 오른다
스스로를 보호할
찢어진 우산 한 개도 없는 인생이라고
연민하다가 살 부러진 채
사라져간 낡은 우산들을 생각한다
세상은 우산을 들어주는 자와
들지 않는 자로 구분된다는
젖는 이와 젖지 않는 이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내 오른쪽 팔뚝이 말짱한 것을 의미심장하게 본다
퍼붓는 빗속에서도 물오리처럼
젖지 않은 것은 우산을 들었던 팔뚝이다
부모들은 평생 젖기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이쯤에서 해체하기로 한다
우산은 우산 받쳐주는 자의 기쁨 때문에
활짝, 활짝 펴진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내가 늘 한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안다
- 『올랜도 간다』, 푸른사상사, 2013.
*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우산을 들어주는 자와/ 들지 않는 자”, “젖는 이와 젖지 않는 이”다. 우산을 들어주는 자는 자신보다 상대를 더 챙기다 보니 비에 젖기 십상이고, 우산을 들지 않는 자는 오히려 다른 누구가의 희생으로 젖지 않고 살 법하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음을 시인은 곧 깨닫는다. 우산을 들었던 팔뚝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멀쩡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산은 우산 받쳐주는 자의 기쁨 때문에/ 활짝, 활짝 펴진다”는 인식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남을 설파하기보다는 자신의 문제로 돌리면서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젖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는 한기를 몰아내지 못한다는 걸 배웠다. 젖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면서 추운 계절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 딱한 부류가 나인지 묻게 된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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