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휘파람 부는 나무 / 장옥관

톰소여와허크 2013. 10. 5. 16:42

휘파람 부는 나무 / 장옥관

 

 

케냐의 소들은 목덜미에 혹을 달고 있었다

지독한 건기를 견디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무들은 혹 대신 가시를 매달고 있었다

내가 본 마사이 마라의 나무들은 모두 아카시아였다

어떤 아카시아는 휘파람을 불 줄 알았다 사람들이 다 자는 오밤중에 홀로 휘파람 부는 나무

마른 가시로 가시를 딱딱 부딪치며

휘파람 부는 나무

 

새 엄마가 들어오는 날

아홉 살 사촌 형은 우리집 무화과나무 아래서 종일 휘파람을 불었다 열매를 혹으로 매단 나무가 넓은 손바닥으로 어루만져주었다

작은아버지의 혹을 어루만져주었다

 

혹독한 건기, 휘파람이

견뎌야 할 나날을 어루만져주었다

 

-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문학동네, 2013.

 

 

감상- 케냐의 소에 정말 혹이 있는지 찾아보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건기를 견디기 위한 혹이라고 하니 사막을 지나는 낙타 등에 혹이 발달한 이유와 비슷할 거 같다. 낙타의 혹은 지방 덩어리다. 그 지방은 먹이가 며칠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 부닥뜨리게 되면 자연스레 분해되어 낙타에게 수분과 영양을 보충해주는 비상식량 역할을 한다. 수분과 영양에 대한 걱정이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혹이 사라진다고 한다. 케냐의 소에 혹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황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찌 보면, 내일에 대한 걱정과 대비가 혹을 키운 거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장옥관 시인은 소의 혹에서 나무의 가시로 이야기를 옮기더니 결국 혹 같기도 하고 가시 같기도 한 사람 사이 이야기를 전한다. 재혼을 앞둔 작은아버지에게 혹이 있으니 아홉 살 난 자식이란다. 새어머니가 어떤 분이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아홉 살 인생에게는 혹독한 건기의 시작일지 모른다.

스스로 견뎌야 하는 시간, 누구도 자기편이 아니라고 믿는 쓸쓸한 시간에 무수한 혹(열매)을 지녔던 무화과나무가 할머니 손바닥 같은 이파리로 아이를 어루만져주니 적잖은 위로가 된다. 처음의 휘파람이 가시를 세우는 소리였다면, 나무를 떠날 때의 휘파람에는 얼마간 가시를 누그리는 마음도 담겨 있을 것이다.

소의 혹이나 나무의 가시가 생존을 위한 전략이라면 사람의 혹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의 결실과 고통을 동시에 생각나게 한다. 장옥관 시인은 견뎌야 할 나날이기도 하단다. 스스로를 혹으로 생각하는 순간, 제 가시로 저를 찌르는 일도 있겠지만 그런 가시가 있어서 인간적으로 더 성숙해진다는 얘기도 많이 듣고 산다.

 

어쩜, 혹에 대한 예의는 가만히 지켜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괜한 감상을 보태서 혹 하나 붙인 격이 되지 않으려면 이만해서 말을 줄이는 게 좋겠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낌 / 서규정  (0) 2013.10.22
우산에 대한 새로운 이해 / 한혜영  (0) 2013.10.16
가야산 / 이하석  (0) 2013.09.23
동화 / 서정춘  (0) 2013.09.17
그녀는 프로다 / 이기와  (0) 201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