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의 뺑소니 / 한인숙
질주하던 차량의 앞 유리에 꿩이 꽂혔어
꿩이 달려드는 속도로 내 머리는 앞 유리를 받았지
순간, 허공엔 금이 갔고
선홍색 피가 흐르는 내 이마엔 꿩의 솜털이 박혔어
꿩의 비틀대며 숲으로 숨어들고 있었어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일종의 뺑소니였지
꿩의 과속은 어디부터였을까
앞 유리에 비친 나무를 제 공간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라
숲의 아름드리가 유리창을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거든
그의 유영은 빠르지만 부드러운 곡선이었어
고속도로에서 내가 앞차와 추돌할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꿩과 나
어느 쪽이 더 놀랐는지 알 수 없지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찢긴 이마와 깨진 앞 유리 여전히 벌렁대는 심장
갓길에 차를 세우고 숲을 뒤지기 시작했어
놀란 바람이 뛰쳐나와 갈대의 따귀를 갈겼지
출렁이던 갈대가 씨앗을 던졌어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의 나에겐 의미를 주지 못했어
한참을 뒤적이다 머리를 땅에 처박은 채 꽁지를 세우고 있는 놈을 발견했어
파르르 떨리는 깃털이 눈부시게 빛났지
헐떡이는 놈을 차마 걷어찰 수 없어 킁킁 기척을 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어
한방 제대로 먹은 셈이지
깨진 틈으로 서해의 낙조가 흘러들었고
로드킬, 또 다른 죽음이 타이어에 빨려들었어
- 『자작나무에게 묻는다』, 문학의전당, 2014.
* 한국도로공사 자료(2014)에 의하면 해마다 로드킬로 희생되는 야생동물 숫자가 이천 마리 정도로 나오지만, 신고되지 않은 경우와 지방의 국도를 망라하면 매년 수만 마리 이상의 동물이 찻길에서 죽어나갈 것으로 여겨진다.
지구 환경을 걱정하고 생명을 가꾸려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인간만을 위한 속도 경쟁과 편의 추구를 멈추라고 주장한다. 갓길 울타리나 생태이동통로를 확대 보급하는 것도 이런 노력이 결실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나 아직은 미미한 성과에 그치고 있다.
제 기능이 의심스러운 울타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인식의 전환일 것이다. 타인을 배려해야 인간공동체가 아름다워지듯이 타 생명을 존중해야 지구공동체가 아름다워진다는 생태주의적 인식의 공유가 절실해 보인다.
위 시는 한편의 아찔하고도 흥미로운 활극을 통해 그런 인식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차 유리에 비친 나무를 실제로 생각한 꿩의 오산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꿩을 추격하고 마침내 로드킬에 대한 인식 자체를 새롭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처음에 “나”는 자신이 피해자 입장이 되어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꿩을 맹추격하지만, 막상 “파르르 떨리는 깃털이 눈부시게 빛나”는 한 생명을 대면하는 순간에 “나”는 이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저도 고귀하고 눈부신 생명이며, 그 생명이 억울한 사고로 인해 꺼져가는 급박한 처지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쌍방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숲의 영역을 인간이 무단침입한 죄가 더 과중하다고 보는 시각이라면 “나”는 오히려 가해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피해자로만 생각하고 쫓아왔다가 “한방 제대로 먹은 셈”이다.
슬픈 뺑소니를 위해, 로드킬 당한 영혼을 위해 시인의 서명을 받아서 네 바퀴 괴물을 가두도록 청원하고 싶은 마음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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