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팔육 선생 / 김부회
작달만한 153센티
다부진 어깨에 까무잡잡한 얼굴
삼수 끝에 서울농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선생
도살자라는 별명답게
너덜너덜한 수학책을 뒷주머니에 꽂고 등장한 학기 첫날
퀭한 눈빛 날리다 불쑥,
일필휘지 一八六
수학기호인지 육두문자인지
남자의 자존심, 이것만 꼿꼿하게 세우고 살자며
게슴츠레 웃는다
귀밑머리 희끗희끗 선생님 닮아갈 즈음
소주잔 기울이는 겨울 덕장의 명태들
여적, 선생님 비문을 풀지 못한
껌벅 눈 늙은 명퇴(名退) 한 마리에게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과 이것이니라 하며
세로로 박박 새겨 준 글자
불콰한 얼굴로 어깨동무하며 돌아서는
촌놈들 등 뒤로,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더 가져와 같이 먹자던 마음과
박봉 털어 등록금 대신 내 주던 속 깊은 눈빛, 여전히
둥실 떠올라 비추고 있는 하늘
- 『詩답지 않은 소리』, 다시올, 2014.
* 술자리 중간에 물 좀 빼러 나왔다가 모퉁이에 주저앉는 날, 보름달이 휘영청하거나 바람이 간지럽거나 하여 주위 분위기가 돕는 날이면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이 문득 생각 키기도 한다. 더러 술김을 빌어 통화를 시도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시인이 떠올린 사람은 학교 선생이다. 동창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을 것인데, 학생들에게 미더운 분이었나 보다. 내 경험을 돌이켜 보더라도 수업 잘 하시는 분보다 수업 진도에 아랑곳없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시는 분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고 그런 분들의 어록이 두고두고 삶을 살아가는 데 영향을 끼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세대일수록 “남자의 자존심”은 더 큰 설득력으로 와 닿겠다. 좋은 말씀은 오래간다. 공자의 말씀이 이천년 이상 가듯이, 일팔육 선생의 말씀도 그만한 무게를 갖고 오래 가기를 빌어 본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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