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나와 마을 / 임미리

톰소여와허크 2014. 12. 24. 18:40

 

샤갈, 나와 마을(1911)

나와 마을* / 임미리

 

 

금빛 모래톱이 덤프트럭에 실려 사라졌어요.

모래톱을 거닐던 물새는 어디로 갔나요.

작고 예쁜 새끼들 날개를 달았을까요.

사각사각 물새와 하염없는 이야기 주고받던

갈대들이 그려놓은 기하학적 무늬도 사라졌어요.

강물의 이야기 쉼 없이 받아 적느라

팔목이 시큰거린다면서도 즐거워하던 수양버들

봉두난발하고 바람에 실려 멀리 떠났어요.

궁금증이 물결처럼 멀리서부터 밀려오는데

세상은 빛을 잃고 채도가 낮은 푸른색만

머리 위에서 두둥실 구름을 따라 다녀요.

베라의 사랑, 샤갈이 마을에 돌아온다면

지상에 발을 딛지 않아도 살 수 있을까요.

가벼운 육체는 두둥실 하늘을 날고

무중력 상태의 거리엔 무엇이든 떠다닐 거예요.

지구엔 더 이상 남아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주인만이 시공간을 뛰어넘듯 날아다닐 거예요.

어느 날 마을은 블리자드에 시달리다

지구상에 주저흔을 남기며 사라질 거예요.

샤갈, 이제 더 이상 베라를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밤하늘에 별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거든요.

 

* 샤갈 작품

 

- 『엄마의 재봉틀』, 고요아침, 2014.

 

 

  * 샤갈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고향 마을 (벨라루스의 ‘비테프스크’)을 주제로 한 그림을 꾸준히 그렸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소설가 박상우는 동명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함 - 에 영감을 준 ‘나와 마을’이 많이 알려졌지만, 이외에도 고향 마을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를 바탕으로 그 마을 위로 연인이나 가족이 두둥실 나는 환상적 분위기의 그림도 여러 점이다.

  샤갈이 고향 마을을 애틋하게 떠올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유년의 추억과 함께 동향 출신의 아내 베라의 영향이 컸다. 또한 긴박한 국제정세에도 불구하고 고향 마을은 그곳의 문화와 전통을 상당 부분 지니고 있었기에 작가에게 끊임없이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히 시인의 고향은 그렇지 못한가 보다. 시 전반부의 고향 상실의 이미지는 샤갈 그림에서 연상된 바도 있겠지만 당면한 현실의 문제로 읽힌다. 무분별한 공사로 파헤쳐진 강과 모래로 인해 물새는 떠나고 갈대도 수양버들도 끙끙 앓는 판이니 자연과의 유대도 예술적 영감도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림 속의 샤갈과 베라는 언제든 마을로 내려설 수 있겠지만, 현실은 조금씩 불운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느낌이다. 이미 마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리 없는 유령이 되어 맥없이 허공만 딛고 가야할 것이니…….(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