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가만히 흔들리며 / 최승자

톰소여와허크 2014. 12. 28. 07:30

가만히 흔들리며 / 최승자

 

 

키 큰 미루나무

키 큰 버드나무

바람 사나이

바람 아가씨

 

두둥실 졸고 있는 구름 몇 조각

 

꼬꼬댁 새댁

꿀꿀 돼지 아저씨

음매 머엉 소 할아버지

 

모든 사물들이 저마다 소리를 낸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내 그림자가 가만히 엿듣고 있다

내 그림자가 그러는 것을

나 또한 가만히 엿보고 있다

(내 그림자가 흔들린다

나도 따라 가만히 흔들린다)

 

-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지성사, 2010.

 

 

  * 자아성찰과 자아분열이 그렇게 먼 촌수가 아님을 생각한다. 윤동주의 <서시>에서 자아성찰을 읽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투명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영혼의 그림자를 느낀다. 이상(李箱)의 <거울>에서 자아분열을 읽지만 참된 자아를 꿈꾸는 자기성찰적인 정신이 벼리어 있음을 안다.

  모든 사물들의 소리를 “내 그림자”가 듣고, 내 그림자를 “나”가 엿보는 모습은 이상(李箱)이 그랬던 것처럼 자아분열상을 보여준다. ‘그림자인 나’와 ‘실질적인 나’가 하나로 통합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겉으로는 건강하다고 하겠지만 그들에겐 깊은 성찰을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마음공부란 것도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데, 자신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것을 병적이라고 일컫는 것은 난센스다.

  우리는 조금씩 아프다. 아픈 마음을 읽어주는 게 사는 데 큰 힘이 된다. 남이 읽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읽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같이 “가만히 흔들리며” 지켜보기를 권한다. 그러다 보면, 미루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아가씨 이야기도 귀에 걸릴 것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남슈퍼 가는 길 / 박일환  (0) 2015.01.08
박새에게 세 들다 / 복효근  (0) 2015.01.01
나와 마을 / 임미리  (0) 2014.12.24
적자생존의 법칙 / 이강하  (0) 2014.12.16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 박완호  (0) 2014.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