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적자생존의 법칙 / 이강하

톰소여와허크 2014. 12. 16. 21:07

적자생존의 법칙

- 흰꼬리사슴 / 이강하

 

펑펑 내리는 눈발 속 흰꼬리사슴이 보인다

어쩐지 이번은 내 생(生) 마지막 눈일 될 것 같아

형이 떠나던 무렵, 그 첫눈이다

흰꼬리사슴, 괜히 붙여진 이름이 아닐 거야

형, 흰꼬리 번쩍 들고 어디든 가자

 

나약한 언어는 바로잡고

낮은 자리 어떤 소리도 사소함으로 여기지 말자

단단한 뿔이 긍정을 포효하듯

우리가 처한 가난은 곧 끝날 것이니

늘 소중한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입천장의 감각기관은 아직 성실한가

이번 겨울만 잘 넘기면 미래는 우리일 것이니

페로몬과 침을 나뭇가지에 묻히는 일

두 개의 발을 겨누어 보는 일

붉은 투사의 뿔로 수백 그루 나무를 긁어댈 수 있는

그날이 우리일 것이니

 

그러나 식욕은 점점 길 잃은 눈발,

가뿐 숨소리로 저녁이 나른하다

누군가 떠나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가

저 멀리 오크나무도토리를 먹는 다람쥐가 아련하다

 

- 『붉은 첼로』, 시와세계, 2014.

 

 

  * 아는 “형”에게 “흰꼬리사슴”의 이미지를 투사시켜, 형의 한때를 긍정하면서도 형의 부재를 견디는 모습을 읽는다. 단단한 뿔로 영역을 표시하고 그 안에서 안녕을 원하는 흰꼬리사슴! 곧추세운 흰꼬리는 자랑이나 자존도 되겠지만 세상에 대한 경계를 풀지 못하는 고단한 일상의 느낌도 물씬 풍긴다.

  눈밭의 흰꼬리사슴이나 “형”은 “낮은 자리”에서 고군분투해 왔지만, 그 성실함에 값하는 대우를 좀처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열심히 산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뿔의 힘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몸을 유지하고 움직이게 하는 동력인 기본적인 욕망마저 빠져나갈 즈음 생의 전면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

  흰꼬리사슴도 다람쥐만큼이나 도토리를 좋아한다. 생각해 보니 힘센 녀석이 도토리를 다 가지는 일은 숲을 망치는 일이다. “적자생존”이란 말을 나누어야 생존한다는 말로 고쳐 듣고 싶은 거다. 살아남은 도토리는 숲을 만든다. 개중에 다람쥐나 흰꼬리사슴의 속을 지나온 도토리일수록 울울창창할 것이다. 가난한 시인의 속을 지나온 시 한 편처럼.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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