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먼나무 / 류인서

톰소여와허크 2015. 6. 7. 19:42

 

먼나무 / 류인서

 

 

겨울나무 붉은 열매 속을 걸으며 누군가

어쩜 먼나무인 줄 알았네, 하고 탄식하듯 낮게 읊조린다

 

스쳐가는 그 말끝 건져올려 ‘먼나무 당신’ 소리없이 되뇌면

머나먼, 눈먼, 나무 한 그루 떠듬떠듬 지팡이도 없이

보이지 않는 눈밭을 헛밟으며 온다

 

잎자루에서 이파리까지 먼나무

어둠들 청수바다 건너 노래만큼 먼나무

발자국도 그림자도 얼룩얼룩 붉은 문장 저 나무, 구름과

새도 아직 보지 못한 먼나무

 

- 『여우』, (주)문학동네, 2009.

 

 

  * 먼나무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부지런한 시인들이 먼나무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도 먼나무에 대해 못 다한 이야기가 분명 있을 텐데 그 출발은 먼나무에 대한 거리를 좁히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먼나무에 대한 어원도 가지가지다. 누가 이 나무가 뭐냐고 물었더니 먼 나무라고 되물으면서 먼나무가 됐다는 설을 지지하고 싶지만, 수피에 먹물처럼 검은 빛이 돈다 해서 먹낭(검은나무)으로 부르던 것이 점차 먹나무 먼나무로 됐다는 설도 그럴듯하다. 구슬 같은 열매가 탐스러워서 멋나무로 불렀다든지, 시인이 인용한 “잎자루에서 이파리까지 먼” 나무라서 그렇다든지 하는 설에도 고개가 숙여진다. 사실, 애초부터 이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니 어느 하나의 설을 전적으로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어쩜 먼나무인 줄 알았네”라는 누군가의 탄식에서부터 먼나무가 시인의 귀에 살기 시작한다. “머나먼, 눈먼” 나무, 또 그런 나무를 닮은 자신 혹은 당신이라니! 시인은 멀고도 가까운 인연을 생각하며 걸었을 테지. 더러 잡고 더러 놓친 인연 속에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관계 그쯤에 먼나무가 있을 것이다.

  먼나무는 가까이 있어도 먼 나무지만 멀리 있어도 생각나는 나무이기도 하다. 인연은 거리를 좁히는 것이니, “떠듬떠듬” “헛밟으며” 가는 게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는 마음으로 “청수바다 건너”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먼나무는 조금 더 멀리서 손짓을 해올 수도 있다. 잡히지 않는 당신처럼, 잡히지 않는 문장처럼 아직, 먼, 먼나무이기에.  (이동훈)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kheenn/15856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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