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묵묵부답 / 도광의

톰소여와허크 2015. 5. 25. 11:33

2014 반곡지에서

묵묵부답 / 도광의

 

 

둑에 나무 베어 버리고 난 이후에

물에 잠긴 그림자 볼 수 없었다

소쿠리 모양 에둘러 앉아있던

한가한 산 그림자 볼 수 없었다

나무 몇 그루 베어 버렸다고

물에 잠긴 산 그림자 볼 수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지나가던 여자가 대꾸한다

글쎄요, 나 또한 묵묵부답일 밖에…….

- 『하양의 강물』, 만인사, 2012.

 

 

*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수록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말을 꺼내곤 한다. 서로의 견해차에도 상식, 비상식, 몰상식이 붙는 걸 보면 상식도 상대적인 건가 하는 의구심이 있지만 상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도 세기를 지나고 보면 허구로 판명되는 경우도 적잖은 게 사실이다. 그러니 가장 상식적인 사회는 자신이 상식이라고 믿는 것을 따르되 이를 절대시하지 않는 사회일 수도 있겠다.

둑에 나무를 베어냈더니 이전에 있던 산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경험적 추리와 과학적 현상에 근거해 보면 상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를 바로 부정하지 않고 행간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또한 상식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까운 나무 그림자에 먼 산의 그림자가 안겨서 더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시인의 진의는 딴 데 있을 것이다. 숲이 나무 한 그루를 키우기도 하겠지만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숲이 되고 산이 되기도 한다. 나무 하나의 운명이 산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더 억지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는 연기론까지 생각이 가 닿는다.

바람 부는 날이면 초록 머리를 살랑거리던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는 새의 노래로 잔물결 일렁이던 저수지의 마음을 읽는다. 예까지 와서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는 산 그림자의 마음까지 읽어 주면, 나무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산의 허락도 없이 물의 허락도 없이 나무 한 그루를 앗아간 것이 폭거와 다르지 않음을 생각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나의 상식이지만 시인의 묵묵부답보다 못한 게 틀림없다. 시인이 말을 아낀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상식을 흔들어 또 다른 상식을 세우는 더 많은 말들이 있을 줄 헤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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