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먹고 사는 일 / 이사랑

톰소여와허크 2015. 5. 21. 11:04

 

먹고 사는 일 / 이사랑

 

 

이른 아침

산밭에 다녀온 어머니 말씀

 

어젯밤 멧돼지가 와서

고구마 죄다 파먹었다

 

어머니가 이랑마다 뿌린 땀

서리서리 된서리 맞았다

 

냅둬라! 배고픈 것들

나눠 줄 게 그것밖에 더 있나?

 

죄다 배고픈 죄다

먹고 사는 일이 죄다, 죄다

 

- 이사랑,『적막 한 채』, 다시올, 2015.

 

 

 

* 먹을 것을 찾아 농가나 심지어 도심에 내려오는 멧돼지를 두고 ‘멧돼지 습격 사건’이라는 그럴 듯한 제목을 뽑는 가십거리가 낯설지 않은데, 멧돼지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사투가 우스개로 포장되는 게 억울할 것이고 또한 농가 입장에서도 수확을 가로채 가는 멧돼지가 고울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재미난 기사 제목에 끌리면서도 불편한 뭔가가 있다. <흥보전>에서 매품팔이를 위해서 가난 자랑을 하는 사람들을 웃지만, 마냥 웃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함부로 웃어서 안 되는 것은 “죄다”(all)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면 남에게 너그러워지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내 입만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입을 생각하는 마음이 모일 때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인의 어머니처럼 이웃의 형편을 생각하는 마음이 동식물에게까지 미치면 더 조화로운 생태공동체가 될 것으로 믿는다.

  먹고 사는 일이 “죄다(all 또는 sin), 죄다(sin)”라는 중의적 표현이 주는 울림이 적지 않다. 먹는 일이 죄 짓는 일이라면 인디언 어느 부족처럼 미안해하며 먹어야 할 것이고, 적게 먹어야 할 것이고, 그래도 남는 것은 나누어 먹으면 좋을 것이다. 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 대신에 목구멍이 가난해서 다행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져나가기를 꿈꿔 본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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