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男子의 집 / 우옥자
축대 끝 적산가옥 울타리에 개나리꽃 흐드러지게 피었다
아버지는 인연을 끊자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자식 집이 여기냐? 돌연 거센 힘에 그 집 마당 한가운데 나동그라졌을 때, 스물두 살의 그녀는 발목이 부러졌다 개나리꽃 혼미하도록 가물거리는 봄이었다 으-이구 독한 년, 기어이 시집을 가려느냐 어머니의 탄식이 깊었다 그녀는 입술 앙다물며 웃는 버릇이 생겼다
울음 터지듯 샛노란 웃음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축대 끝에 매달렸다 회초리처럼 휘청대는 가지마다 뻗쳐오르던 꽃, 노랑이 초록으로 번져갈 무렵 그녀는 헝클어진 가지를 잘라내곤 했다
봄앓이를 견딘 울타리는 한 뼘 높아지고 더욱 촘촘하게 이파리를 토해냈다
올해도 흰 머리칼처럼 뻐세게 개나리꽃 피어났다
저 무지렁이 꽃, 활활 노란 불길에 휩싸였다
평생 한량이었던 남자
그 여자의 집을 다시 봄으로 물들이고 있다
- 『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 발견, 2015.
* 지난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은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 전문을 인용하면서 시가 소설의 창작 동기도 되고 서사의 줄기도 되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박완서는 이후 <그 남자네 집>에서도 이전의 <그 여자네 집>과 다른 이유로, 그렇지만 <그 여자네 집>과 똑같이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야기한 바 있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그리움을 부르는 집이라면, 우옥자의 그 남자네 집은 개나리 “샛노란 웃음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축대 끝에 매달”린 아슬한 집이다. 박완서의 그 남자는 현실을 우선했던 여자에게 선택받지 못했지만, 우옥자의 그 남자는 “평생 한량”의 기질을 고치지 않고도 여자의 집에 들어앉은 느낌이다. 그 여자가 시인 자신이라는 보증은 없지만 왠지 노란 불길 속의 그 여자와 그 남자가 시인의 자아상과 지향 상(像)을 함축하는 듯도 하다.
한량은 생업을 떠나 밥이 되지 않는 곳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시인에게도 한량이 씐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의 봄이 그 여자에게로 환하게 옮겨붙은 것이다.
“입술 앙다물며 웃는 버릇”의 ‘그 여자’와 첫 발령지에서 책상을 마주한 인연이 있다. 조심스럽게 ‘옥자의 전성시대’를 비는 것으로 안부를 대신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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