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가운루
고운사 풍경 / 김용락
등운산 골짜기가 온통 5월의 뻐꾸기 울음소리로 도배질한다
고운사에 와서는 학문자랑 말라고 한 때도 있었다던데
화냥기를 느낄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한 단청
이미 고운사는 옛 고운사가 아닌가 보다
할머니가 이른 새벽 쌀 한 되박을 머리에 이고
30여 리 길을 걸어가 늦은 점심공양하고 해 저물녘 돌아오던
산판장에서 송이를 얻어왔다고 밤이슬을 털며
수군거리던 아버지의 음성을 잠결에 흘려듣던
국민학교 6년 소풍은 쌀 반 되 허리에 꿰차고
단풍나무 숲 속을 걸어 허공에 뜬 것 같던 가운루에서
하룻밤 자고 오던 그 추억 어린 단촌 고운사
저녁 연기처럼 가늘고 질긴 끈으로 나를 묶고 있다
살다가 이승의 한 쪽 다리가 늪에 실족해
인생의 용맹정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둘러보니
뻐꾸기 소리만 허공에 메아리칠 뿐
내가 찾는 부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 『시간의 흰 길』, 사람, 2000.
* 시인의 고향에 유서 깊은 고운사가 있다. 의상대사와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되어 도선국사를 거쳐 크게 일어났던 절이다. 근대에 와서도 “학문자랑”이 여전한지 모르겠지만 이곳이 ‘연꽃이 반쯤 핀 형상’의 명당자리라는 말이 괜히 있을 성싶지는 않다.
어쩜, 시로 성업하고 교육으로 포부를 이루려했던 시인도 명당 기운을 반쯤 받은 것일 테고, 여기에 할머니 공양과 아버지의 정성이 더해져 이만한 삶을 살지 않겠는가 싶은 거다. 시인이 “하룻밤 자고 오던” 가운루(駕雲樓)는 계곡 위에 지은 멋들어진 누각이다. 1668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전에 최치원이 설계한 것을 이어받았을 개연성도 있다. 이 가운루를 몇 번 지났어도 지금껏 시 한 줄 얻지 못했으니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부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거다.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그것도 대를 이어 공양미까지 머리에 이고 허리에 차고 온 가까운 이웃을 먼저 챙기는 심보다.
하지만 고운사가 옛 고운사가 아닌 것처럼, 시인도 젊은 날의 패기와 열정을 오롯하게 간직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구름이 높게만 날 수 없는 이치인지, 삶은 다 그런 건인지, 시인은 한 쪽 다리를 늪에 들여놓고 있음을 안다. “부처의 모습”도 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새로 걸음을 떼려고 분발하는 마음이 곧 길이다.
고운사에 다시 가봐야겠다. 떠가는 구름장 하나 잡고서 며칠 앓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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