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먹감나무 비밀 / 윤명수

톰소여와허크 2015. 10. 21. 08:45

먹감나무 비밀 / 윤명수

 

돌멩이를 집어 들고

영천할미네

잘 익은 감을 향해 던졌다

눈먼 돌멩이가

하필이면 장독대에 떨어졌다

장독 깨지는 소리가 뇌성처럼 울렸다

냅다 줄행랑을 쳤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때마침 감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던

폐병쟁이 석철이가

영천할미에게 붙잡혀 대신 치도곤이 났다

그 모습을 훔쳐보며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코밑이 새까매질 무렵

폐병쟁이 석철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미안한 마음이

멀리 도회지까지 두고두고 따라다녔다

 

지천명을 앞둔 어느 가을날

고향집 골목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니

지난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는 듯

먹감나무 홍시 하나를 툭,

발밑으로 떨어트렸다

 

폐병쟁이 석철이의 각혈이었다

 

- 『고정관념이 개똥벌레에게 끼치는 영향』, 문학의전당, 2013.

 

 

  * 먹감나무란 감나무가 따로 있는 게 아님을 새로 알았다. 오래된 감나무의 속이 단단해지고 검어지기도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먹감나무는 재질이 괜찮은 데다 세공한 무늬가 아름다워 문갑이나 장식장, 받침대나 다탁으로 즐겨 사용된다.

  고향집 먹감나무 앞에 온 시인. 떨어진 홍시는 “폐병쟁이 석철”의 각혈을 연상케 한다. 석철이가 “나” 대신 억울하게 혐의를 뒤집어쓰고 혼쭐나던 일이 감나무 아래 있었다. 끝내 모른 체하고 키득거리던 아이는 철이 들면서 이를 두고두고 미안해한다. 어쨌든 스스로 입을 떼지 않는 한 완전범죄일 수 있겠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이제 먹감나무가 된 감나무가 증인이 되어 잘못을 추궁해오는 것이다. 시인은 먹감나무가 보내온 신호를 바로 알아듣는다. 감나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무늬를 만들고 먹감나무가 되었듯이 자신 안에도 그런 무늬가 생겨서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먹감나무 비밀은 무늬다. 연년이 빨갛게 익는 동안 속은 점점 까매지고 깊어진다. 먹감나무는 보이지 않는 곳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미안한 일을 줄이고, 미안한 일을 미안해하고, 그렇게 한 생이 지날 즈음 내 마음의 무늬도 먹감나무를 닮아가기를 빌어 보는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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