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미한 등불 밑에* / 고운기
살아가는 일의 곡절이 있어
때로 잠 못 이루는 밤과
때로 느꺼이 잠드는 밤이 번갈아 찾아왔었다
자주는 오지 마라, 곡절이여
깊이 사랑하지 못한 세상과 사람
미안하단 말일랑 하지 말라고
고맙지 않느냐고 가슴 펼 일 좀하라고
떠난 사람은 내 귓가에 그렇게 남아 있다
산새가 털고 간 나뭇가지 끝에서 눈이 날린다
* 황금심이 부른 <외로운 가로등>에서
- 『구름의 이동 속도』, 중앙북스(주), 2012.
*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이 실연의 아픔을 사뭇 처량하게 노래하는 장면이 있다. “영원히 그 사람을 사랑해선 안될 사람”이라고 노래하는 순간, 그 노래는 온전히 자기 이야기가 된다. 이 시집에도 유행가를 바탕으로 한 시가 많은데, 유행가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연을 슬쩍 얹어서 읊조리는 느낌이다. 노랫말마다 곡절이 있을 것인데, 좋은 노랫말은 노래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노래 부르는 가수나 또 그걸 따라 부르는 사람의 곡절까지 더해지면서 울림을 키워가도록 끄는 힘이 있는 듯하다.
<외로운 가로등>은 출세한 애인을 잊지 못해 그가 다니는 기방을 기웃거린 순정녀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는 배경 설명이 있다. 진부하고 유치한 얘기일 순 있지만 박인환 시인이 일찍 간파한 대로, 우리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목마와 숙녀」중에서)한 면이 없지 않다.
시인은 사정(事情)이란 단어 대신 곡절(曲折)이란 말을 선택했다. 곡절이란 단어가 얽히고 구부러진 세상사와 시절 인연을 함축하는 느낌이 있어서다. 살다 보면 “살아가는 일의 곡절이 있어” 잠을 못 이룰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도 “무슨 곡절이 있겠지” 하며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기도 한다. 곡절은 자신의 인생 굽이굽이를 껴안으면서도 세상을 읽는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에게 곡절은 썩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하여 거리가 생긴 인연도 한 곡절인지 모른다. 인연은 멀리 떠나 있을지언정 “가슴 펼 일 좀 하라”는 말은 시인의 귓가에 남아 있다. 산새가 뜬 것과 나뭇가지가 아주 무연할 수 없는 이치에도 생각이 미치지만 속속들이 알 재간이 없다. 다들 자기 곡절에 따라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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