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므가 사는 집 / 한영채
오월 꽃그늘이
포록포록 달포된 강아지를 재운다
처마 밑 펑퍼짐하게 눌러앉은 독,
타는 가슴 불길 잡으려
여태 맑은 물 고집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사랑채 모퉁이 느티나무 옹이,
오도카니 이파리에 익숙하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들
고물고물 육 남매 바람 잘 날 없던 곳
할머니 관절염 앓기 전부터
초록은 그늘을 앓는다
혼기 지난 시누이의 신열 같은 골똘함이
옹이진 채 안으로 개울물 소리 일 때
촉수 세운 새싹들
할아버지 손길로 느리게 수평을 일군다
드므 앞 앉은뱅이 나무의자
둥근 독 속에 비친 그의 파랑을 기억한다
느티 아래 무순을 뽑아
새댁 입덧 맞추느라 분주한 오후
구름 한 자락 줄장미 담장을 너머
드므를 다녀간다
오래된 물거울이 훤하다
드므엔 노부부가 산다
- 『신화마을』, 시와소금, 2016.
* 시인의 첫 시집 『모량시편』에 들었던 시를, 스리슬쩍 고쳐 낸 걸로 보아 시인의 애정이 담긴 시 한 편이겠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물독이다. 짓는 데 공이 많이 들어간 가옥이라면 처마 밑에 드므를 두기도 한다. 화마(火魔)가 제 모습을 비춰 보고 끔쩍 놀란 나머지 불장난도 잊고 오던 길로 줄행랑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란다.
유년의 시인 집에도, “맑은 물”을 간직한 그런 드므가 있었나 보다. 불귀신 대신에 시인 혹은 육 남매의 “타는 가슴 불길” 잡는 구실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펑퍼짐하게 눌러앉은 독”은 구조상으로 뭔가를 받아주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드므는 각자의 파랑(파랑은 빛깔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물결이기도 하다)을 좋이 견디면서 넘치지 않게 조절해준다.
드므가 사는 풍경의 진짜 주인은 할머니, 할아버지다. 노부부도 한때의 파랑이 없었을까마는 스스로 수평이 되어, 일어나는 파랑을 쓸어준다. 그러면서 노부부도 드므를 닮아간다. 관절염 앓다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가 마침내 드므와 한통속이 된다.
시인은 드므가 있다고 하지 않고 주인처럼 산다고 했다. 사는 동안은 추억의 저편 이야기가 아니고, 구름 한 자락 머무는 동안은 쓸쓸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새댁의 입덧까지 있으니 할머니-아들-손녀로, 할아버지-딸-손자로 대를 잇는 파랑을 드므가 다 받아줄 것이다.
시인에게 드므는 고향이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이기도 하고, 자기 정체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인의 주소지는 모르긴 몰라도, 드므 옆일 것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떨림을 놓치다 / 서양숙 (0) | 2016.09.03 |
---|---|
남들이 시를 쓸 때 / 오규원 (0) | 2016.08.26 |
그 변소간의 비밀 / 박규리 (0) | 2016.08.12 |
사일로가 보이는 식탁 / 이윤학 (0) | 2016.08.01 |
량허란써징디엔 洋河藍色經典 / 홍해리 (0) | 2016.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