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생각 / 박지웅
한판 붙자고 했다, 설명 없는 말은 힘이 좋다
이를테면 ‘나와’라는 말, 허풍처럼 들리지 않는다
‘왜’라고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깔끔했을 것을
그를 따라가던 ‘순간’은 얼마나 수동적이었나
그 기억만은 아무리 뒤바꾸려 해도 정확히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말하는 사람으로 나는 영원히 따라가는 사람으로 정해진 일
다시 선택할 수 없다는 건 참을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상하게 이글거리지 않는 것이다
사실 흔해빠진 줄거리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죽사발이 되어 누웠던 운동장 그래도 다행한 일은
느리게 자막처럼 올라가던 구름들을 오랫동안 바라본 일
그래 그 정도면 나의 격투신은 아름답게 끝났으니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2012.
* 상상 속의 나는 참 멋있는 사람이다. 평시엔 평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개인이지만, 불의를 보면 물러서지 않고, 상대가 힘이 셀수록 나는 더 결연해진다. 십칠 대 일이라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한 명씩 해치워 마침내 상황을 정리한다. 약간의 부상을 훈장으로 달고 나의 활약을 떠들어대고 흠모할 주변사람으로부터 애써 무심해지려 한다.
이런 상상 속의 일부는 나일수도 있겠지만 더 많은 부분은 도저히 나일 수 없다. 십칠 대 일은커녕 일 대 일도 부담스럽다. 어떻게든 힘센 애와 부딪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으로 생각하고, 불의를 보면 화가 나지만 잘 참는다. 그럼에도 생이 순탄치 않아 “나와”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얘질 것이다.
“나와”, 듣지 말아야 할 그 말을 시인도 들었나 보다. 말없이 주먹을 쥐고 비장하게 나서거나, 추워 임마, 나가고 싶으면 니 혼자 나가 새캬, 정도를 주워섬기면 좋을 것을 시인은 “왜”라는 말만 순진하게 흘리고 엉거주춤 따라나섰나 보다.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강탈당하고 얻어터지는 학생1, 학생2의 모습이다. 시인은 이 장면에 대해서 아쉬워하지만, “죽사발이 되어 누웠던” 장면에 대해선 오히려 담담하다. 첫 장면은 시킨 대로 수동적으로 따라나선 거고, 둘째 장면은 실컷 맞았지만 역으로 자신이 고분하지 않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리적 힘이 모자란 만큼 더 큰 대가를 치렀지만 끝내 자존심을 놓지 않았으니 이 승부는 한쪽으로 기운 것이 아니라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인생도 계란도 한판으로 끝나는 건 아니니 선택지는 또 다시 주어질 것이다. 부당한 폭력에 대해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폭력도 뒤를 생각하고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한판 붙는 것보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도 사는 방편이지만 그 참을성이 자랑만은 아닌 줄 알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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