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혹은 냄비에 대한 추억 셋 / 이동훈
오원 십원 하던 만화에 푹 빠진 동무는 제 점방을 털었어.
냄비에 든 동전 몇 닢 그러쥐고 시장 길까지 줄달음질쳤으니
그런 풍경도 꽤나 만화적이었을 거야.
점방 아주머니 병나고
점방 아들 철나면서 만화의 세계를 일찍 졸업한 건
꼽사리 끼던 내겐 몹시 불운한 일이었어.
냄비의 축난 돈을 아는지 모르는지
셈도 없이 라면 끓여주고 아들 대하듯 머리 쓸어주던 아주머닌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고
점방 문이 닫히고, 점방 아들은 점점 먼 데서 편지를 부쳐왔지.
지방 대학 시절, 계단 밑 지하 창고를 자취방으로 썼어.
안 그래도 곤로의 석유 냄새로 지끈거렸을 머리인데
낮은 천장을 깜빡한 대가로
콘크리트와 그 세기를 겨루었으니
한 발 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머리통을 꾹꾹 눌러대어야 했어.
라면 봉지와 계란 몇 개 들고 방문했던 벗들도
좁은 문으로 엉거주춤 들어와서는
나갈 땐 무심코 일어나서 그예 번갯불을 냈지.
그때부터 머리 감싸는 게 생활이 된 벗은
냄비의 라면 맛만큼은 기절할 정도라며 지금도 엄지를 세우지.
누군 라면 몇 박스 없애고
낮잠으로 국방부 시계를 다 돌렸다는데
삽자루 몇 개 부러뜨려도 막막하던 초병 시절
고향 안부를 묻던 선임이 느닷없이 암호를 대라고 했지.
손목에 적어둔 글자도 못 보고 바짝 얼어 있으니
헬멧을 개머리판으로 찍지 않겠어, 젠장!
그나마 바로 졸도한 게 재수야.
다시 지워지지 않을 암호는‘종로’ 그리고 ‘냄비’였으니
그날 이후 구세군 냄비만 봐도 절레절레하지.
졸고 졸아서 바닥이 헌 양은 냄비.
신발장 위에 놓인 냄비에 동전 몇 닢 쨍그랑하니
호기심 어린, 점방 아들 같은 눈이 따라오지 뭐야.
그래, 지금
라면 익는 냄새로 흠흠거리는 저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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