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연과도(一路連科圖)* / 이동훈
일로연과(一鷺蓮果), 백로 한 마리와 연밥 그림이라.
한 번에 합격하라는 일로연과(一路連科)인 줄 알면
남의 운수를 빌어주는 마음이 기껍기도 하련만
정작, 그린 이는 폐가의 후손 되어
중동 꺾인 연 줄기처럼 후줄근하지 않았겠나.
온몸에 박힌 가시로 저릿저릿했을 생애
가시의 날을 세우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쓴 날들이
마침내 결실하듯 연밥의 표정이 된 날이 있었다.
그 아래 백로가 무연히 지나고
그 지나던 백로가 둘이 되기도 한 것은 훗날의 이야기다.
다음을 기약하라는 이로연과(二路連科)의 서운한 말씀일랑
무명화가의 실수로 웃어넘기고
백로의 조신한 걸음새로 그림 밖으로 나가다가 월커덕!
물풀에 다리 잡혀 곤두박질치는 생각이란
一路에, 잘난 맛에 혼자 웃지 말고
二路, 三路 해서 길을 익히라는 것 아닌가.
옆도 뒤도 보고, 고생 고생해서 깊어지라는 거 아닌가.
묵향이 별건가.
세상에 지고 그 세상을 앓는 마음이
연밥에 스미고 백로로 핀다.
*심사정(1707~1769)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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