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비밀번호 / 박상률

톰소여와허크 2016. 12. 7. 00:21




비밀번호 / 박상률


무슨 회의 끝나고 밥 먹으러 갈 참이었다

선배 작가 한 분 자꾸 미적거리며

사무실 직원 컴퓨터 쓰고 있다

선배의 선배 기다리다 한 말씀

급한 거 아니면 집에 가서 쓰지?

선배 표정 우그러들며 모깃소리 만하게 대답

집 컴퓨터는 비밀번호가 걸어져 있어서 못 써요

선배의 선배 왈

그럼 풀고 쓰면 되지

선배 왈

나는 풀 줄 몰라요

선배의 선배 왈

풀 줄도 모르면서 왜 걸었어?

선배 왈

내가 건 게 아니라 애들이 걸어놨어요

선배의 선배

왜?

선배 왈

아빠가 이상한 것만 봐서 걱정된다고……

컴퓨터 맘대로 쓰게 했다간 아빠 버린다고, 애들이……

(흠칫하는 선배의 선배, 아이들 말투로)

뭥미?

(모두)

그 집 애들 크게 되겠네!


역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 『국가 공인 미남』, 실천문학, 2016.

 


  *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워즈워스의 ‘무지개’ 한 구절이다. 어린 시절에 간직한 동경, 모험심이 어른이 된 지금에도 삶의 동력이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장난스럽게 치켜세우는 ‘아이’는 무지개 쫓아가는 아이는 아닐지언정 ‘어른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

   이 시의 재미는 일상을 뒤집어놓은 풍경에 연유한다. 보통의 경우는 어른이 게임하는 애들을 걱정해서, 그 나이 때는 아무리 좋게 일러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된다든지, 너희를 믿지만 그 유혹이란 게 어른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며 컴퓨터를 없애거나 잠금 장치를 하는 것인데, 어른과 아이의 역할이 180도 바뀌어 나타나니 엉뚱하긴 해도 이전의 생각을 사뭇 흔들어버리며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어놓는다.

   “뭥미?”라는 유쾌한 구어 속에는 반전과 놀람과 깨달음이 한꺼번에 들어있다. 여기서 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는 사고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구절의 “역시”로 시작되는 예의 인용구절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뜻대로 따라주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아이답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긍정이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혹은 사랑이라는 핑계로 아이의 의사표시와 의사결정을 번번이 좌절시키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랬다면 저 유쾌한 반전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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