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디아스포라 / 채형복

톰소여와허크 2016. 12. 15. 21:19

디아스포라 / 채형복


떠났다

떠나야 했다

내게도 뿌리가 있었던가

중심이 있었던가

곱씹으며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한 방울 짠 눈물마저 흐르지 않았다


왜 떠나야 하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강퍅한 현실은 채찍 되어 등짝을 후려치고

질곡으로 얼룩진 운명은 사슬 되어 목줄을 조이고

바람에 날리는 야윈 몸

쭉정이 볍씨처럼

허공중으로 날려 흩뿌려졌다


모진 목숨 이어간 이 땅에,

긴 모가지 빼들고 수구초심 그리는 이 땅에,

설레는 가슴으로 한번도 안아보지 못한 이 땅에,

고향에


부초처럼 떠도는 유랑의 삶을 접고

씨앗으로 뿌리내려 싹 틔울 수 있을까


살아서도 돌아오지 못할 이 땅에,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할 이 땅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한 이 땅에,

고향에


오체투지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면

혼백으로나마 돌아올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 그들은 위대했다고

신의 허명으로 말하지 마라

사상과 이념으로도 말하지 말라

모래무지에 잠든 위대한 전설은

바람에 쓸려 사라지고 없으니


헐벗고 굶주린 내 영혼에게

따뜻한 밥이나 한 끼 지어다오


-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 한티재, 2016.



   *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바깥을 떠돌던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다가,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경계인 내지 경계 밖으로 떠도는 이주민을 함의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유대인이 그러하듯 어떤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방랑과는 구별되는 느낌이 있다.

이 시에서 디아스포라는 특정 누구를 연상하고 쓴 느낌을 우선 받는다. 분단 조국에 북남에 차례로 기대를 걸었다가 남북 모두에 환멸을 느끼고 바다에 투신했던 『광장』의 이명준이 꼭 그런 사람일 것이다. 내년이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된다는 윤이상 작곡가에도 생각이 미친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추방당하고, 고향인 남쪽 통영에는 못 가고, 북쪽 평양에는 초청받아 갔던 사람. 군사 정권이 끝나고 자신의 음악이 연주가 되었어도 정작 본인은 이념 문제로 고향 땅을 끝끝내 밟지 못했다.

그 윤이상을 “널따란 얼굴이 유난희 희다”(‘명동유란’에서)고 기억하는 김규동 시인도 디아스포라다. 함북 경성 고향마을에 어머니를 두고 몇 시간이면 마주할 거리를, 그려놓은 선 하나에 막혀 평생 건너가지 못했으니 “살아서도 돌아오지 못할 이 땅”,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할 이 땅”에 애증이 사무쳤겠다.

윤이상, 김규동 또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이 “강퍅한 현실”에 쫓겨 세상 밖으로 내몰렸을 텐데 시인은 디아스포라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문제이지 “신의 허명으로”, “사상과 이념으로” 함부로 포장하거나 재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인식한다. 물론 시대의 질곡과 개인의 이념, 가치관이 부딪히면서 디아스포라가 양산되는 것이긴 하지만 디아스포라에게도 이념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디아스포라는 시인 스스로 자기 안의 기질을 상당 부분 드러낸 것이기도 하겠다. 길에서 길로 떠나고 다시 길을 묻고 길을 생각하는 걸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요약해 본다면 그 길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걸까. 시인은 “따뜻한 밥이나 한 끼”로 답을 대신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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