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백학기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서 있으면 아내와
아이가 떠오른다. 화가 이중섭의 제주도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며 살다간 그 슬픈
자화상이 흘러가는 구름 속에 잠시
머문다. 고독과 외로움을 바람에 실어 보낸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또는
늙은 황소와 닭들의 싸움이 먼 능선에 아련하게
그려진다. 슬픔은 예리한 송곳으로 가슴을 찢고
세상을 보는 내 이마를 할퀸다. 바람은 그렇게
먼 지평에서 불어와 내 자화상을 밟고 간다.
인동의 꽃을 피워 내는 세월을 쫓아 아내와 아이가
있는 전주의 다가산과 천변까지 몰려가는
오장육부까지 썩어 가는 이 그리움.
썩을 대로 썩어 아내와 아이를 위한 구름이
되어 내 지금 무슨 시를 쓸랴는가.
제주에서 한 폭의 자화상을 떠올리는데
화가 이중섭이 곁에 다가와 속삭인다, 자네도
슬픈가보다, 라고 어깨를 짚는 바람 속에서
눈물 몇 점 떨군 같은 제주의 하늘에
살별이 뜬다. 바람이 살별을 흔들고 있다.
- 시전집『가슴에 남아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 더클, 2015.
* 고흐나 중섭이나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그림에 쏟아냈으나 가난에 내내 시달렸다. 말년에 정신쇠약 증세를 겪고 사후에야 평가받으며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그림 외에 작가의 생애와 생각을 유념해볼 수 있는 편지를 다수 남겼고 이 점이 지금의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는 점이다. 중섭의 편지는 일본에 있는 아내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주된 내용이지만, 편지지에 동봉하거나 함께 그려진 삽화도 인상적이다.
“당신은 실로 아름답고 소중하고 훌륭한 내 사람이오. 빨리 만나 오래오래 포옹하여…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하나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멋들어진 일을 해냅시다”(『이중섭 편지와 그림들』,박재삼 역)에서 보듯 중섭은 자신의 애정을 편지마다 아낌없이 드러냈지만 그가 생각하는 ‘멋들어진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주 시절은 그나마 가족이 모여 살던 시기였지만 생활고로 인해 가족을 친정인 일본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후 “오장육부까지 썩어 가는 이 그리움”에 사로잡혀서도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또는/ 늙은 황소와 닭” 그림을 완성시켜 나갔을 것이다.
시인은 제주에서 중섭의 흔적을 좇는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자화상은 정신쇠약을 의심받던 시절, 이를 부정하며 연필로 그린 “그 슬픈/ 자화상”(1955년)이기도 하겠지만 그림 한 점 한 점 지나오며 중섭의 삶 전체를 투영하는 자화상이기도 하겠다. 또한 “자네도/ 슬픈가보다”며 자신에게 속삭이는 중섭의 목소리를 통해 시인은 중섭과 자신을 그만 동일시해버린다. 그러니 중섭의 자화상은 동시에 시인 스스로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 아이를 위한 구름”이란 표현에서 떠오른 작품이 있다. ‘길 떠나는 가족’(1954)이 그것인데, 중섭의 손바닥에서 떠난 구름이 서울의 하늘, 제주의 하늘, 고향 원산의 하늘, 아내가 건너간 일본의 하늘로 자유롭게 날 것처럼 경쾌하지만 그림에서 붓을 뗄 것 같으면 그 자유는 단지, 이중섭의, 백학기의, 화가의, 시인의 쓸쓸한 바람으로 남는다. 그래서 더 간절한 바람 말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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