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리 오층석탑 / 조재형
의성 탑리 마을에 가면
자태 고운 신라 여인 한 분이
오랫동안 살림 한 번 옮기지 않고
아직도 살고 있는데요
탑리성당 지붕의
뾰족탑 위에 십자가도 지그시
그녀의 고운 자태를
부러운 듯 내려다보고 있는데요
나는 이웃한 여학교의 선생이 되어
어여쁜 아이들한테 수업시간마다
저 창밖에 선 여인만큼만 진득하게 자라 달라고
자꾸만 얘기하구 싶어지지요
애들이 잘 알아들을지는 모르지만요
- 『하늘 몇 평』, 한티재, 2016.
* 의성 탑리 오층석탑에 얼마 전에 다녀온 것 같은데 사진 자료를 찾아보니 2012년으로 나온다. 빙계 계곡 가는 길에 들렀다가, 탑이 내뿜는 기운에 쬐었는지 바로 나서지 못하고 멈칫멈칫했던 기억이 살아난다.
탑이 주변보다 살짝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데다 몸피도 상당하고 자세도 의젓해서 마을 어른으로 대접받는 느낌이었는데 탑리란 마을 이름도 이 탑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 인상이 나만의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겠다.
시인은 이 무렵, 인근 학교 미술 교사로 있었나 보다. 가까운 사이에 신비감이 줄어드는 것처럼 오층석탑이 평범하게 느껴질 법도 했을 텐데 그러기엔 시인의 미적 감응이 컸을 것이다. 어쩌면 오층석탑이 시인의 영혼을 장악하고 시 한 편(그림도 있을지 모르지만)을 얻어내고서야 시인을 놓아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탑을 “자태 고운 신라 여인”으로 생각한다. 학생들이 탑의 아름다움에 물들어 같이 고와지기를 바라는 것은 여성적인 것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다. “오랫동안”, “진득하게”란 표현 속에서 세월에 대한 존중도 읽을 수 있다. 천삼백 수령의 탑 앞에서, 수백 수령의 고목 앞에서, 정들고 오래된 것 곁에서 자꾸만 얘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깜직한 아이들이 알기는 할까.(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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