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향촌동 / 이해리

톰소여와허크 2017. 1. 20. 14:38




향촌동 / 이해리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던 이곳이

늙을 대로 늙어서 눈을 맞는다

구질구질 좁은 골목 허름한 건물들

시인 이상화가 중절모를 쓰고

목조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

화가 이중섭이 커피 값 대신

은박지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백록다방

피난 온 예술인들이 만남의 장소로 썼다는

아루스화방 감나무식당은 어디로 가고

늙은 바람기처럼 뒷골목에 서성거리는 성인텍, 우남여관,

동남아 노동자로 보이는 이방인들이 떼지어

이합집산할 뿐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눈을 맞는다

눈은 내려서 이 모든 것을 덮고

넝마가 된 대구의 근대도 덮지만

1970년대 중반 갓 스무 살 한 청춘의 방황은 덮지 못한다

그때도 지금 젊은 세대들처럼

발버둥 쳐도 주어지지 않던 기회와

선택조차 할 수 없었던 막힌 세상이 있었다

길이 없어 길을 잃으려고 흘러들었던 거기

유리구슬 주렴 아래 배꼽 깊은 무희가

베사메무쵸, 베사메무쵸, 스트립쇼 하던 곳

희망보다 향락을 먼저 가르치던 네온 불빛

노래하고 춤추면서도 마음이 슬프던,

마음의 아련한 슬픔 때문에

영영 절망하지만은 못했던,

한때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던 이곳이

늙을 대로 늙어 눈을 맞는다


- 『미니멀 라이프』, 천년의시작, 2016.


   * 해방 전 이상화, 이장희, 백기만, 오상순 등이 교류하던 대구 문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피란시절이 문화예술의 전성기로 기억되고 있고 그 중심에 향촌동이 있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음악다방인 녹향과 르네상스가 있었고, 여기에 최정희, 이중섭, 유치환이 드나들고 신동집, 정석모, 전상렬 등 지역문인이 어울렸다.

   이중섭이 구상을 기다리며 은박지 그림을 그리던 백록다방(뉴대구여관 골목)과 몇 집 건너 호수다방도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지금은 이름만 전하는 감나무집, 말대가리집, 석류나무집에서 마해송, 조지훈, 최정희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몰려 막걸리 잔으로 어수선한 시기를 넘어갔다.

   시에 나오는 “아루스화방”은 화가 이인성이 경영했던 ‘아루스 다방’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수필가 이화진이 인수하여 동문다실로 이어갔지만 지금은 아루스화방이란 이름에서만 그 흔적이 남아있는 셈이다.

   눈 오는 날, 시인은 향촌동에 왔다. 이미 전설이 된 향촌동 시절을 뒤로하고 뒷골목 성인텍 주변으로 노인과 외국인 노동자만 오가는 것은 옛 전성기에 비해 참으로 무력해 보이는 풍경이다. 시인에게 향촌동은 이십 대의 방황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길이 없어 길을 잃으려고” 작정하던 마음이 아슬하기도 하지만, “마음의 아련한 슬픔 때문에 / 영영 절망하지만은 못했던”이란 구절에서 슬픔과 위로를 한꺼번에 받는다. 차라리 길을 잃겠다는 것은 충동적인 청춘의 특권이지만, 실망과 슬픔 그로 인한 연민의 감정이 부지불식중에도 새로운 길을 더듬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북성로와 남성로로 이어지는 향촌동 일대는 근대골목 사업의 일환으로 조금씩 면모를 바꾸어 나가고 있다. 향촌동!, 건물이 바뀌고 사람은 늙어도 눈은 전과 같이 내리고 이야기도 좀처럼 늙지 않는 곳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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