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다락방의 말향고래 / 정영주

톰소여와허크 2017. 1. 24. 08:44


다락방의 말향고래

- 요선동 시장 162번지 / 정영주



어둠을 밝히는 손가락 촉수가

말향고래 내장을 관통한다

출렁이는 향기름이 십 촉 불빛보다 진하다

다락방을 훑는 취기의 아비

귀를 막은 다락방이

물렁한 제 몸에 나를 넣고

회칠한 무덤처럼 시치미 뗀다

아비 고함이 사다리를 타고

쥐소리 없이 난

말향고래 뱃속에 엎드려 있다

고래 뱃속이 옥합이다 기름이 내 몸을 바르고 넘친다

고래 갈비뼈 틈새에서 헤엄을 치면

이따금 시장 바다에서 흘러들어오는 잡어들,

시끄러운 소리, 냄새 욕지기도

아비 험한 욕보다 덜 비리다

다락방과 내가 키운 새끼 말향고래가 이제

다락방을 터뜨릴 기세다

사나운 이빨이 더 커지고 이빨 새로 보이는

시장통이 더 커지고

더는 무섭지 않은 내가 더 커지고

나는 하늘로 난 쪽창문을 열고

말향고래 아가리를 벌린다

나를 토해, 나를 밖으로 토해

이제 널 허공에서 키울 거야

말향고래 등허리에서 향기름이 솟구친다

그 분수 꼭대기에 매달려

비로소 동굴 밖으로 토해지는 나


- 『말향고래』, 실천문학, 2007.



   말향고래는 수염고래와 이빨고래 중 이빨고래에 속하는 종으로 향유고래의 다른 이름이다. 고래 머리를 가득 채운 기름기가 램프 연료, 비누 연료, 음식 요리를 위한 성분 등으로 유용하게 쓰임으로써 오래전부터 인간의 사냥감이 되어 왔다. 다른 이유이긴 하지만 에이하브 선장이 그토록 잡고 싶어 했던 모비딕도 말향고래다. 내장에 소화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부분은 용연향으로 불리는 향의 재료가 되어 더 쓸모가 많다. 그로 인해 종의 말살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고 하니 말향고래 입장에서는 기름과 향을 물리고서라도 평화를 얻고 싶을 것이다.

   시인은 이 말향고래를 유년의 다락방 이미지와 교차시킨다. 말향고래가 새끼를 품듯 어린아이를 품어주고, 아이 스스로 새끼 말향고래를 키우기도 하는 데서 말향고래와 아이의 밀착은 더 강해진다. 말향고래의 뱃속은 곧 아이의 다락방이다. 동굴이자 밀실이기도 한, 그 또래의 향을 간직한 곳이기는 하지만 주위는 불안하기만 하다. 말향고래에게 작살로 위협하는 고래잡이 선원이 있었다면 아이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술에 취한 아버지가 그런 존재다. 아버지의 “고함”과 “험한 욕”이 귀를 막을 정도로 싫고 사다리로 올라올까 봐 두렵다. 그 시기의 다락방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우호적이지 않은 세계를 견디는 숨구멍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고, 이후 아이는 아버지 혹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화해하거나 그 세계를 극복하면서 스스로 다락을 내려왔을 것이다.

   시인은 이를 좀 더 극적인 장면으로 표현한다. “말향고래 등허리”에서 뿜어내는 분수에 얹혀 세상으로 나오는 그림이 바로 그것인데 고래에게 재치기를 유도해서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는 피노키오의 활약 못지않다. 이는 쓸쓸한 유년을 동화적 환상으로 보상받고 싶은, 자기가 자기에게 내미는 선물 같은 것일 테다. 아이는 이제 새끼 말향고래와 함께 세상을 마음껏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정영주 시인의 시에 드러나듯이 다락은 공공연하게 개방된 곳이라기보다는 비밀스럽고 사적인 성격이 짙다. 그러다 보니 혼자만의 보물 창고가 되기도 하다. 이때 보물은 어떤 물건일 수도 있지만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상상하고 서늘하게 꿈꾸는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




Artem Chebokha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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