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물 먹은 책 / 길상호

톰소여와허크 2017. 2. 15. 19:11



물 먹은 책 / 길상호



빗물을 받아먹은 수십 장의 입술은

쭈글쭈글 불어 있었다


나는 빗물로 붙여놓은 그의 입술을

아슬아슬 떼어내며 읽었다


납작하게 눌려 있던 말들이

젖은 오후에 대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입속을 가득 채운 문장들은

씹어도 단물이 배어나오지 않고


책장 넘기는 비린 소리를

고양이가 쫑긋 귀를 펼쳐 주워먹었다


빗물이 그려놓은 얼룩이 선명해질 때까지

입술마다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다만 표지는 두꺼운 입술로

아직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 『우리의 죄는 야옹』, 문학동네, 2016.


   * 시인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이 시집을 책꽂이에서 빼다가 밑에 있는 어항에 빠뜨리고 말았다. 시집을 볕에 내놓았다가 드라이로 말리고 한 장 한 장 붙은 입술을 떼기 시작했지만 몇몇 장은 아교풀로 붙인 듯하여 양쪽으로 찢다가 정말 찢어지는 아픔을 남겼다. 해프닝으로 지나면 그만이지만 우연찮게 이 시를 만나서 공교롭다는 생각이 든다. 빗물과 어항 물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물 먹은 책, 그 속에 불었다가 눌렸던 언어들이 입술을 열고 나오고 싶어 하는 걸 시인은 눈치채고 있다. 글의 평범한 단맛은 시인에게 죽을 맛인지도 모른다. “죽은 글자들을 위해서는/ 더 깜깜한 죽음이 필요했다”(‘썩은 책’ 중에서)는 말처럼 한 줄 문장을 위해선 어둡고 절박한 상황까지도 안아야 한다. 물을 만나 비린 것들, 들러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생의 우여곡절과 어울린다. 그 과정에 잘 마른 “얼룩” 같은 시 한 편 남기는 것도 필생의 과제 아니겠는가.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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