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깨달음에 관하여 외 6편 / 임보

톰소여와허크 2017. 2. 19. 20:18

한 떨기
민들레꽃이여


눈물겹기도 하다

이 광활한 우주의
강기슭에서

문득 이 아침
너를 만나다니

- 임보, ‘가연(佳緣)’전문( 시선집『지상의 하루』, 우리시진흥회&도서출판 움, 2017)

임보 시인의 이 시를 읽다가 문득, 시집 한 권 한 권이 다 아름다운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임보 시인과 홍해리 시인은 두 분 다 20여권의 시집을 남기며 현역으로 시를 살고 있다. 월간 『우리시』에서 두 분을 뵈었던 인연으로 시집을 받기도 하고, 언제부터인가 짧은 감상글을 적기도 한 것이 돌아보니 제법 쌓였다. 한두 편 읽고 가시면 그것 또한 인연이리라.


1. 깨달음에 관하여 / 임보

선사들이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진리를 터득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이 무엇인가를 깨쳤단 말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알았다는 말인가

영구불변한 절대적 진리는 없다
그러니 터득했다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 세상이 무엇인가를 깨쳤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무한 시공의 대우주 실상을
오척 인간의 작은 머리로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깨달았다면 만사가 부질없다는 사실이리라

그러니 깨달았다는 것은 살아가는 방도- 즉
어떻게 사는 것이 마음고생을 더는 길인가에 대한 것이리라
어떤 이는 욕심 줄이는 일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절대 자유-무애불기無碍不羈에 가 닿기도 한다
사람의 성미가 천태만상이니 만족하며 사는 방도도 천태만상
남의 깨달음에 귀 기울이지 말고
네 방도를 찾도록 해라

네 생애의 주인공은 오직 너뿐이다.

- 『山上問答』, 시학, 2016.

* 시인의 이번 시집은 묻고 답하거나, 깨달음의 일면을 전하는 잠언 형태다.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즐겨 사용했다는 문답식 수업은 학습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배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점이 있다. 다만,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있는 환경이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고, 학습 주체들 간에 질문을 의미 있게 가다듬거나 확장시키며 대답을 통해서 생각을 키우는 선생의 역할이 필요해 보인다.
문답(問答)의 문(問)은 문 아래 입이 있는 형상의 글자다. 문에 들일지 말지, 좀더 기다리게 할지 말지를 두고 열심히 말하고 그 이상으로 열심히 듣는 과정 자체가 문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서 출입이 자유로워지는 맞춤한 단계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답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 답을 깨달음으로 바꾸어 불러도 좋을 것이나 시인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며 진리에 이르는 완전한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도 깨달음이 있다면 “욕심 줄이는 일”,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일 등“살아가는 방도”에 대한 개별적인 깨달음이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것은 없기에 남의 깨달음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방도를 찾는 쪽으로 가기를 시인은 안내한다. 마침, 읽고 있는 소설 《끝없는 이야기》(미하엘 엔더)에 나오는, 여왕의 신표에 새겨진 글자도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다. 아직 다 읽지 않은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잊고 있긴 하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묻고 답하는 일이 긴요해 보인다.


2. 아내의 계명 / 임보


늘 하는 훈계지만
전기밥솥에서
밥을 뜰 때는
숟가락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도 혼자
매실주 한잔 마시다가
(아내는 부재중)
밥솥에서 몇 숟갈 밥을 뜬다

밥주걱 찾기가 귀찮아
아내의 계명을 어기고
그냥 숟가락으로 밥을 푼다

아차,
숟가락 끝이 밥통 바닥에 닿는다
(도금에 상처 나면 큰일이다)

그렇지만
혹 아내가 발견해도
나는 주걱으로 펐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내 속이
이리 언짢은 걸 보면
계명은 역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인가 보다

- 『아내의 전성시대』, 시와시학, 2012.

* 정월 대보름 풍속에 귀밝이술을 마시는 게 있다. 어른이 주는 술을 입에 살짝 대야 일 년 동안 귓병도 없고 남의 말을 잘 듣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귀밝이술이란 단어 속에는 소통 불능의 답답한 세대를 훈육하고 싶어 하는 선인들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을 것도 같다.
주위에서 자신에게 해 주는 이야기는 대개 바람직한 행동 유형과 관련이 깊지만 자기 딴의 감정과 자존심에 옭혀 남의 이야기를 흘려듣게 되고 더러 고깝게 여기는 마음도 적지 않다. 사소한 일이라도 삐딱한 마음(부당한 요구와 처사에 대한 삐딱함은 예외로 치자.)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경계하지 않았을 때 갈등과 다툼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위 시는 소소한 일상에서 겪게 된 시인의 내면 풍경과 변화를 재미나게 그렸다. 시인이 아내의 요구를 잔소리라 하지 않고 계명이란 명명한 것은 웃음을 주려는 의도가 작용한 탓이겠지만, 그 바탕에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어서다. 그런 마음이 상호 간에 귀를 밝아지게 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살다 보면 일부러 고집을 세우고, 한번씩 꾀도 피우고, 일탈도 감행하게 되지만 시인으로부터 귀밝이술 같은 말씀을 듣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계율로부터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될 거라고. 그런 불편은 사지 않아도 좋을 거라고.


3. 간월암 看月庵/ 임보


간월암 섬절을 물어물어 갔더니
바다가 미리 알고 물길을 열었네
마른 바다 모래 밟고 건너가 보니
절 문은 닫혀 있고 신우대만 으스스
무학舞鶴이 났다는 학돌재는 어디고
만공滿空이 깃들었던 선방은 어딘가
바다 막아 육지 만든 벽해상전碧海商田 가에
굴 파는 여인들만 옷깃을 잡는데
안개 속에 바다는 주저앉아 버리고
하늘엔 낮달도 보이지 않고
간월암 간월암 목탁 소리만
나그네 가슴속을 파고드누나

- 『눈부신 귀향』, 시와시학, 2011.

* 물때를 맞추어 간월암에 들었으나 간월암은 절 문을 닫고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다가 문이니 따로 절 문이 있어서 닫아 놓을 것 같지는 않지만 실제 그렇다면 절은 섬에 들어 갇히고 문을 닫아 또 한 번 갇힌 꼴이다.
무학이 있을 때 절은 바깥을 향해 열려 있었을 것이고, 만공이 있을 때도 절은 안팎으로 열려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무학이 바라보았을 달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전설과 전설의 소문을 그리는 사람에게 상업화된 주변 풍경은 실망이다. 지금의 간월암이 기대에 못 미치는 가운데 닫힌 문(닫혀 있지 않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은 서운하고 쓸쓸하기까지 한 화자의 내면으로도 읽힌다.
시인의 '간월암' 낭송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가슴속에서 나오는 육성으로 “가너람 가너람……”(간월암 간월암) 외면, 어떤 존재든 지향 여부를 떠나 조금씩 피안(간월암의 원래 이름이 ‘피안사’彼岸寺라고 한다)으로 기울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끝 간 데 모를 세월과 운명 앞에 간월암도 수도승도, 그대도 나도 점멸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전해 오는 것 같다.


4. 산을 그리며/ 임보

생각하지 않으리
하루 종일

삽을 들고
땅이나 파리

육신이 지쳐
허기가 들면

도토리에
막걸리 한 사발

- 『가시연꽃』, 시학, 2008.

* 주말마다 산행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현실의 이런저런 생각을 지우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꽤 있다. 사람 사이, 일 사이 치이고 치여서 두통거리를 달고 입산하였다가도 하산할 때쯤이면 달고 온 놈을 내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가 팍팍할 정도로 걷는 사이에 몸이 힘든 것에 비례해서 생각은 단순해지고 맑아진다는 것이다.
화자가 시 뒤에 덧붙인 말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들 때문’이라 했으니 그걸 내려놓는 자체가 삶을 한결 여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마치 컴퓨터 사용 후 이런저런 불필요한 파일이나 흔적들을 휴지통에 비우면 성능이 한결 나아지는 이치와 같다.
현실 속 이해관계와 그로 인한 갈등이 첨예하면 할수록 산에 대한 그리움을 커질 것인데 아예 생각을 바꾸어 주말의 산행이 아니라 산에서의 삶이면 어떨까 하고 화자는 속내를 슬쩍 내비친다. 삽 들고 땅 파는 것은 최소한의 생계를 생각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배낭에 도시락 넣고 소풍가듯이 떠나는 산행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노동 끝에 쉽게 허기지는 삶에서 보듯이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꿈꾼다면 산으로 가는 것은 후회막급의 선택이 될 것이다. 대신에 마음의 평화나 안정을 위한 것이라면 산은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산에서의 삶은 욕심을 줄여야 한다. “낚시로 두 마리만 잡으면/ 종일 낮잠”(동시집 <어부> 중에서)인 어부의 처세를 배워야 한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져야 한다. 물론, 한 마리도 못 잡을 때에 대한 마련도 있어야 진정한 산촌 삶이라 하겠는데 그걸 의식했기에 화자는 삽을 들었을 것이다. 노동을 떠난 삶은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다. 기쁘게 땀 흘리고 잠시('충분히'로 수정하는 게 낫겠다) 쉬어 막걸리 한 잔 들이키는 삶! 상상만으로도 목울대를 타고 속이 시원해진다. 간절하게 원하면 현실이 된다는데 자꾸 머뭇거리게 되는 건 현실에 볼모로 잡힌 것들이 많아서일까.


5. 대국對局 / 임보

오동나무 그늘 밑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놓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두 분의 기력이 八, 九급쯤?
二급인 내가 보기엔
참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지켜보고 있던 내가 참다 못해
“끊어서 잡으십시오”
하고 흑黑의 노인에게 훈수를 했더니
“아직 빈 땅이 많은데 왜 싸움을 거나?”
하고 듣지 않는다.
“치중置中하여 파호破戶를 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하고 이젠 백白의 노인을 거들었더니
“살려 주고도 이기면 그게 더 낫지 않겠나”
하고 웃는다
도대체 이 벽창호 노인들
내 훈수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싱거운 바둑은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백팔십여 수쯤에 이르러서
갑자기 흑黑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 보기엔 분명 흑이 열댓 집 앞서고 있는데
돌을 던지다니
알고 보았더니
그들이 상上으로 치는 선승善勝은 일호승一戶勝
오호五戶 이상의 승勝은 패敗보다 낮은 것으로 치는데
부득이 그 욕심을 줄이지 못할 때에는
차라리 돌을 던져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들의 바둑 급수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이 붉어져 얼른 자리를 뜨고 말았다.

- 『구름 위의 다락마을』, 우이동사람들, 1998.

* 선시仙詩로 이름한 데서 보듯이 이 시집은 신선 세계의 기이한 경험담이 많다.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이야기의 이면에는 물질주의가 가속화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있어 보인다. 출세의 유혹으로 부정을 일삼거나 부정을 눈감아 주는 부류가 있고 그런 치들일수록 잘나가는 세상이 예나 지금이나 엄연히 있다. 개인으로 복장 터지게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를 찾지 못할 때, 한 발짝 발을 떼면서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방법이 있으니 이 역시 물신에 젖은 현실 체제와 사유 구조를 비판하는 저항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시에서 보듯 두 명의 노인이 바둑 두는 풍경은 꽤나 흔한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남긴 기보는 예사롭지 않다. 二급 이상의 고수면서 관전자이기도 한 화자는 끊어서 잡기, 치중과 파호를 훈수한다. 적의 급소로 돌을 보내는 것이 치중이요, 그렇게 해서 상대방의 집을 깨는 것이 파호니 공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전략이라 하겠다. 훈수에 응하지 않은 두 노인이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선호하는 것은 그들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돌연 이기고 있는 자가 돌을 던지는 데서 상식은 깨지고 기이가 개입한다.
한 집이나 한 집 반을 이기는 것이 선이요, 다섯 집 반을 이기는 것은 진 것보다 못하다는 논리는 억지에 가깝긴 하지만 아하! 무릎을 치게 되는 순간, 새로운 경지를 엿보는 즐거움이 생긴다. 더불어 산다고 얘기하면서 한 집도 아니고 다섯 집 이상이나 더 가지는 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는 거다. 승리의 대가로 미안하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만 더 갖겠다는 거다. 1 대 99니, 20 대 80 사회니 하는 불평등 구조를 일시에 허무는 절묘한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이 아래로 보았던 노인이 급수는 한 집 반이나 반집을 많이 남겼던 이창호 그 이상이니 이 세상 급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한 수 제대로 배웠다는 시인에게 나 또한 배움이 적지 않다. 혼자 집 짓고 혼자 잘 살면 뭐하나. 이름다운 대국을 위해서 바둑돌 던지는 법부터 새로 배워야 마땅한 줄 안다.

6. 숙맥 / 임보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참 숙맥이었다

부끄럼도 잘 타고
비위짱도 없었다

어느 한가위 명절에
내게 들어온 생어물 한 짝
내가 먹기는 과분해

스승의 댁에 넣어 드리고
문 밖에서 그냥 돌아왔다

누가 보냈을까
스승은 무척 궁금했으련만

내가 보냈다는 말을
차마 전하지 않았는데

굳이 드러낼 게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30대의 일이다

-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 시와시학, 2015.

* 《속미인곡》을 읽다 보면 마지막 구절이 인상 깊다. 임의 사랑을 잃고 차라리 죽어 ‘지는 달’이 되어서라도 임만을 쳐다보겠다는 여자에게, 달 되지 말고 ‘궂은 비’ 되라는 친구의 충고가 그럴듯해서다. 일방적인 사랑 대신에 자신의 슬픔과 사랑을 임이 알게 하라는 것 아닌가. 정철이 《사미인곡》에 한번 더 《속미인곡》을 쓰는 속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 말이나 주장을 상대가 온전히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여기서 마음 쓰는 만큼 저기서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러기 위해서 마음 이상으로 표현하는 성의도 있어야 할 줄 안다. 
물론, 그 표현이 지나친 사람도 있어 눈이 시기도 하지만, 시인처럼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낯설지 않다. (시인이 들으면 혼자 숙맥이 아니라서 안도할지 아니면 기껏 인정한 숙맥의 자리를 너나없이 넘본다고 섭섭해 할지 모르겠다). 속된 말로 인사 받으려고 마음 낸 일도 아닌데, 비밀 아닌 비밀을 만들고 그걸로 인해 속이 불편하기도 할 것인데, 그럼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니 이런 숙맥이 없다.(사실은 제법 있다). 사람 사이 정이란 것도 오고가면서 돈독해지는 것인 줄 번히 알면서도 끝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것은 “부끄럼도 잘 타고 / 비위짱도 없었” 던 성향이 한몫했을 테지만, 여기에 이해타산을 셈하거나 주위에 생색내는 일을 기피하는 선비 기질도 거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늦게나마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말을 공공연하게 했으니, 시인을 숙맥 그룹에서 빼주어야 할지 고민이다. 아마 시인은 못 들은 척 자리를 넘겨주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정철은 임금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너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답답한 일이지만,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한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쩜, 사람 자체가 이미 표현이기도 하지 않나.


7. 거미를 보며 / 임보

방 안 내 책상 위 스탠드에
어디서 왔는지 작은 거미 한 마리 줄을 늘인다
거기 늘여 봐야 쓸데없다고
내가 입바람을 불어 밀어내지만
조금 있다 보면 다시 또 줄을 늘이고 있다
이놈아, 여기에 쳐 봐야 걸릴 게 없어
배만 곯아 다른 데로 가
그래도 내 말은 아랑곳 않고 고집을 부린다

그놈을 한참 들여다보다
문득 나를 본다
그놈이나 나나 걸리지 않을 그물 치기는 마찬가지
밤낮 내가 치고 있는 시(詩)의 그물에
걸릴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쓸모없는 시 그물 치며 허송세월하는 놈이나
어리석은 사냥 그물 늘이고 기다리는 거미나
그놈이 그놈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검은등뻐꾸기의 울음』, 시와시학, 2014.

* 책상 위 천장 모서리에 거미 한 마리 사는 줄 우연히 알고 며칠 동거한 인연이 생각난다. 혹시 누가 그걸 보고 소란을 떨고 거미와 거미집을 거둘까 봐 조심조심하면서 몰래 거미와 마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날 그 거미가 책상 위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마음이 복잡했다. 누가 거미의 목숨을 거두었을까, 아니면 영양실조로 제풀에 쓰러진 건가, 왜 하필 내 책상 위란 말인가. 이 의문을 시(詩)로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 이야깃거리가 되고 안 되고는 둘째 문제고 본질적인 문제는 시를 품고 살지 못한 이유다.
시인은 “밤낮”으로 “시 그물”을 치고 있다. 스스로는 엉성하다고 말하지만 그물에 걸린 자는 촘촘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물의 강도나 성긴 정도보다 그물을 친다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임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시의 그물을 엮어가는 일이 시인에겐 일상을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의도적으로 뭔가를 꾸민다는 의식도 없이 자연스레 행하는 것을 지극한 경지라고 말할 것 같으면, 거미와 자신과 시를 그물로 엮어 경계를 넘나드는 시인의 모습에서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또한, 지극한 경지는 삼매(三昧)에서 오기도 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오직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해서 비로소 이룬 생산적인 알짜가 시(詩)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미 한 마리, 지금도 머릿속에서 집을 틀지만 내가 치는 그물은 거미도, 다른 무엇도 포획하지 못하고 근들거리기만 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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