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사람값 / 김용락

톰소여와허크 2017. 3. 1. 14:14




사람값 / 김용락



10대 말, 대학 시험 몇 차례 낙방하고

힘없이 시골집 마루턱에 앉아 있는데

별 배운 게 없는 농사꾼 어머니께서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앞으로 너는 뭐가 될래?

소설가나 시인 같은 글 쓰는 사람이 되지 뭐

어머니 화들짝 놀라시며

신인 그런 거 하지마라

(시인을 신인과 구별 못 하고 잘못 발음하셨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공부 많이 하고서도

매일 술만 퍼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옷차림도 남루한 게 인간 값 못 하더라

아마 어머니께서는

드라마 ‘토지’를 떠올렸는가 보다

가여운 몸종 봉순이를 울린

비운의 주인공 이상현을 생각했는가보다

어머니에게 작가는 술주정뱅이 고주망태

사람값도 못하는 존재인데

이상현도 그랬지만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고뇌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이 세상의 이치를

어머니께서 차마 모르시고 한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지금껏 사람값 하고 사나? 살았나?

가끔 어머니 말씀 생각나 뒤돌아보면

날카로운 비수가 느닷없이 턱밑을 찌르고 달아나는

사람값


- 『산수유나무』, 문예미학사, 2016.


   * ‘토지’의 이상현은 서희를 사모하지만 서희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루 살로메의 선택을 받지 못한 니체와 릴케가 최고의 작품을 남기는 것도 연상되는 대목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고뇌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이 세상”이 글을 쓰게 하고 또 술을 푸게 한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고주망태만 보일 뿐이니 자식이 글 쓰는 사람이 되어 행여 “인간 값” 못하는 탕자가 될까 봐 걱정이다. 그리고 걱정대로 아들은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시인은 사람값 하고 사는 걸까? 이번 시집엔 유독 사람 이야기가 많다. 시인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에피소드엔 편편이 사람값이 드러난다.  시인이 섬겼던 이오덕, 권정생, 전우익 선생 외에도 등장인물이 적잖은데 몇몇 장면을 옮기면,

   이오덕 일기를 읽으며,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하늘나라에 잘 계시죠/ 밤 12시 지하 연구소에서/ 나 혼자 두 팔을 번쩍 쳐들고 크게 고함을 질렀더니/ 그만 내 두 눈에 심야눈물이 핑 돌았다”(‘심야눈물’)라든지

   고 신영복 선생과 전우익 선생을 그리며, “‘頓淡’ 거실 벽에 걸린 액자/ 우익 선생님이 용락이 준다면서 받아온 신영복 글씨/ 내가 불필요하게 생각 많은 인간인 것을 어떻게 아시고”(‘신영복 선생님’)라든지

   김사인 시인의 시 ‘중과부적’을 읽다가, “그때 촌놈들 서울 어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낡은 아파트에 이끌어다 놓고/ 자신은 옆방에서 급한 원고 메운다고/ 밤 새 타닥타닥 수동타자기 두들기던/ 선한 얼굴의 30대 초반 그 김사인이 생각난다”(‘빠른 KTX안에서’)든지

   80년대 봄날 교도소에 면회 온 도종환 시인을 생각하며, “그 선하디 선한 두 눈을/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콘크리트 천장을 바라보던”(‘눈물’) 장면이라든지

   인심 좋은 술집 주인 정옥순 이모를 추억하며, “술에 취해도 두 눈만은 맑던 청년들에게/ 술과 밥을 외상으로 마구 퍼주던/ 앞치만 두른 안주인은/ 관세음의 화현보살이었던가”(‘곡주사에서’)라든지

   지금은 칠성동으로 옮겨간 정훈교 시인을 두고,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멀쩡히 잘 다녔던 물류회사를/ 때려치우고 들어 앉아 턱에 수염을 기르고는/ 첫 시집 원고를 쓰느라고 몇 달 째 밤을 꼬박 세우고 있다”(‘김광석 거리에는’)든지

   백낙청, 염무웅 선생이 선거 운동 자금을 한사코 부쳐온 것을 두고, “정년퇴임 하시고 벌이도 없는 어른께서.../ 나는 너무 송구스러워/ 이번에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다”(‘진흙탕 속에 핀 연꽃2’)라든지

   20대 초입에 만난 박경리 선생이 구멍 난 시인의 양말을 보고, “학생은 공부도 열심해 해야 된다/ 돌아다니지 말고 책 많이 읽어야 해/ 이 돈으로 양말 산 신어라”(‘구멍 난 양말’)라고 말한 장면이라든지

   전우익 선생과 권정생 선생이 간고등어를 구우며, “도대체 3만 원짜리 밥 처먹는/ 인간은 양심도 없어/ 이 세상에 굶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데...”(‘안동 간고등어 추억’)라고 말한 장면 등등 이야기가 있는 시가 사뭇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와 닿는다.

   시인은 사람값 못할까 봐 “날카로운 비수” 운운하며 자신을 성찰하지만 고마운 사람을 많이 간직한 게 그 사람값을 짐작하게도 한다. 시인의 사람값을 자꾸 말하는 게 실례인 것도 같지만, 시험에 떨어진 아이에게 “일자무식” 어머니가 던진 “근사한 말씀”을 마음에 오래오래 새기는 모습에서 배움이 적지 않다. 어떤 근사한 말씀인지는 시집으로 확인해 보면 좋겠다.

   무엇보다 삼만 원 짜리 밥 안 처먹도록 단디 주의해야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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