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 이향지
길 위에 누웠다. 가리봉 정상 바위 위에 누워 노숙을 한다. 텐트조차 세울 수 없어 침낭 한 겹 둘렀다. 흐르는 공기의 방. 드문드문 별 박힌 흐린 하늘이 내 천정. 빠르게 흐르는 구름 아래, 봄을 기다리는 번데기 한 마리. 배낭은 베개가 되고, 등산화는 이슬 싫어 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집 두고 길에 누운 여자 머리맡 지킨다.
해질 무렵 이 바위에선 날개미들의 비상이 있었다. 수만 마리의 수개미들이 날개를 떨며, 한 마리의 여왕개미를 호위하고 날아올랐다. 회오리처럼 빙빙 도는 검은 구름. 날개 떠는 소리가 울음소리 같았다. 한 마리의 수개미만 있으면 되는 일에 그토록 많은 들러리를 세우는 게 자연.
날다가 떨어진 개미들이 밤늦도록 바위 위를 기어다닌다. 우묵한 곳에는 날개미들의 시체로 수북하다 내 침낭은 날개미들의 시체 위에 있다. 추락한 수컷들을 깔고 누웠다니, 기분이 좋다. 동정을 지닌 채 죽은 것들의 시체와 동정을 잃고 새끼를 남긴 것들의 몸뚱이 위로 별 달 구름 바람이 뒤섞이며 흐른다. 자연은 잔인하지만 生과 死를 수평저울에 올리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다.
한 쌍의 날개미가 밀월여행을 떠난 하늘에선 구름이 오줌을 싼다. 별빛이 말려놓으면 다음 구름이 오줌을 싼다. 달빛이 호호 불어놓으면 다음 구름이 더 많은 오줌을 싸고 간다. 나는 구름의 오줌에 젖지 않으려고 지퍼를 단단히 올리고 침낭 뚜껑을 끌어다 얼굴까지 덮었다.
발아래 나무들 단풍드는 소리에 산이 끙끙 앓는다. 뚜껑에 달린 지퍼까지 안에서 채우고, 침낭 속의 번데기도 끙끙 앓는다. 눈부신 태양이 깨우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다짐했지만, 번데기가 먼저 일어나 구름 속의 태양을 깨웠다.
-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나남출판, 2001.
* 오래전 불편한 몸에 “걷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인은 걸어서 산을 만나고 산을 걸었다. 산에 관한 저서와 시집은 그 걸은 자국이 몸에 들어와 밖으로 나온 기록이다. 시인은 또 다시 “아픔을 느낄 수 없을 때까지, 나는 걸을 것”이라고 시집 서문에 적고 있고 지금도 어딘가를 걷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용한 시는 텐트 없이 침낭 정도만 의지해서 산에서 밤을 보내는 비박산행 체험을 담고 있다. 시인은 개미 떼의 혼인여행을 인상 깊게 마주한다. 개미 사회는 여왕개미 한 마리가 하나의 왕국이 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 하늘을 나는 밀월여행이 있다. 여왕을 사랑해서 가장 오래 곁을 지킨 수개미 한 마리만 성은을 입고 그 대가로 곧 죽는다. 다른 대다수 수개미는 냄새만 쫓다가 옷깃 한 번 못 잡고 생죽음하는 처지니 잔인하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밀월이란 말이 궁색한 대목이지만 시인은 이도 “자연”으로 인식한다. 사람과 사람 심지어 사람과 개미도, 또 그들의 생과 사도 “수평저울에 올리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연이다. 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인식이다.
산에 가는 순간만큼은 일상의 것을 떼고 간다 혹은 일상의 것을 버리러 간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실제 이런 수사도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반증 아닌가. 산에 대한 시인의 말도 산과 호흡을 맞추며 그 호흡 속에서 일상의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들숨 날숨으로 고민하고 가다듬은 느낌을 준다.
더러 “침낭 속의 번데기” 되어 “끙끙 앓는” 것처럼 고민이 깊을 때도 있겠지만 “끙끙”을 생산을 위한 힘주기로 생각하고 싶다. 수개미의 최후도 암컷과 상관없이 하늘을 날고 모험을 살았다고 보면 그다지 후회스런 장면이 아니다. 나비 날개를 간직한 번데기도 그 생각만으로도 아침을 부른다. 날개를 내고 날개가 마르면 곧 날 것이다. 시인이 「옥갑산」에서 언급한 ‘제 힘만큼만 날면 된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가 와 그카노 니가? / 이종문 (0) | 2017.03.22 |
---|---|
바깥에 사는 사람 / 김소연 (0) | 2017.03.17 |
사람값 / 김용락 (0) | 2017.03.01 |
알밤 깎기 / 박숙경 (0) | 2017.02.22 |
깨달음에 관하여 외 6편 / 임보 (0) | 2017.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