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나무꽃이여, 내가 못 보고 가더라도 / 허영숙
사나흘만 놀다간 사람은 며칠 비 오면 잊어버린다
꽃이 폈다고 환장해도 봄은
엊그제 와서 이제 가버린 사람
비 그친 숲에 빛줄기 들자
달포쯤 수런거리던 눅눅한 생각들
마른 기지개를 편다
거처 옮기는 새들을 따라
고개 숙였던 나무들도 활기를 찾으며 산안개를
옆으로 옆으로 옮긴다
안개를 쫓다 만난 노각나무
흰 동백 닮은 꽃이 핀다 해서
어느 시절엔가 한 번은 그 순한 얼굴을 보고자 했으나
나는 함부로 너를 찾을 수 없고
물어물어 만나지 않아도
스스로 낯을 내미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다 피었다는 전언에
눈 헹구고 찾아봐도 보지 못하는 꽃
바람은 천년을 살며 숲의 도감을 뒤적여 왔어도
누가 어느 순간에 피었다 지는지 다 알지도 못하는
꽃의 생시
뙤약볕에 잎 물러지기 전 꼭 한 번 볼 수 있을까 그 꽃
연두에 숨은 사슴의 눈망울로
나를 그렁그렁 보고 있을지도 모를 노각나무꽃이여
오늘은 너를
못 보고 가더라도
-『뭉클한 구름』,현대시학사,2016.
* 배롱나무, 모과나무, 노각나무는 생김새도 크기도 전혀 다른 제각각의 꽃을 피우지만 얼룩무늬가 있는 수피는 꽤 닮았다. 단단하게 여윈 느낌이 배롱나무 쪽이라면, 모과나무 수피는 조금 더 윤기가 도는 듯하고 노각나무 수피는 상대적으로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슴뿔을 의미하는 녹각(鹿角)이나 해오라기 다리를 칭하는 노각(鷺脚)에서 이름이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반점이 두드러진 사슴 자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시인이 “연두에 숨은 사슴의 눈망울”을 떠올린 것도 우연은 아닌 것이다.
특히나, 노각나무는 눈에 잘 뜨이지 않아 그런지 만나면 더 반가운 느낌이 있다. 시인은 수피도 수피거니와 노각나무 꽃을 마주하기를 고대하며 각별한 정을 표시한다. 시인에게 노각나무는 몇 번 마주친 인연이 있지만 서로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그리움을 키워온 사이다. 꽃 필 때를 기다려 “꼭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다짐을 두지만 바람도 종잡지 못한 “꽃의 생시” 혹은 언제든 불분명한 ‘사람의 생시’로 인해 시인과 노각나무는 아직껏 밖만 맴도는 사이다.
시인이 노각나무꽃를 몹시 생각하듯, 노각나무꽃이든 또 다른 누구든 간에 시인을 그렇게 마냥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면서도 서로의 생각을 놓치고 사는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마음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작정하는 일이 모여서 나무도 사람도 자기만의 무늬를 갖는 것일 테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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