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삼층석탑과 흰배롱나무와 배롱나무(2014)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 물레책방에서 만난 이 시집은 누군가의 손을 몇 차례 거쳐서 나에게 왔을까. ‘90.10.30. 가을 시작 앞에서 정리해야 할 여름의 끝을 위하여’ 라고 메모를 남긴 독자가 이 시집의 첫 번째 주인이었을 것이다. 시인이든 독자든 이 시를 만났든 아니든 다들 기억하고 정리해야 할 저마다의 ‘여름의 끝’을 가지고 있을 줄 안다.
목백일홍(배롱나무)은 무더위와 땡볕으로 말미암아 꽃잎도 녹아내릴 것 같은 여름 석 달에 보란듯이 꽃을 피워내는 강골 체질이다. 목백일홍은 “쏟아지는 우박처럼” 채 피기 전의 꽃봉오리 상태였다가 줄기차게 꽃망울을 터뜨리며 붉은 꽃을 낸다. 시인은 “폭풍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여름날의 ‘나’와 폭풍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 목백일홍을 동일시하고 있다.
꽃을 내는 일이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분명하지만 어둠 속 절망이 익고 삭아서 겨우 꽃을 내민 만큼 이 시의 ‘붉은 꽃’을 두고 성급하게 희망을 읽고 말하는 건 신뢰가 가지 않는다.
몸이 꺾이는 고통과 묵직한 슬픔을 인내하는 가운데, 목백일홍도 ‘나’도 점점 깊어지고 있다. 목백일홍이 꽃으로 자신을 밀어올리듯 시인의 분신인 ‘나’도 이렇듯 자신을 표현하면서 조금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장난처럼”이란 말이 그렇다. 무거운 것을 무거운 걸로 받아 안고 있는 상황이 절망이라면 결박된 것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여유와 장난기가 삶을 활기 있게 되돌려줄 것으로 믿는다.
오는 여름의 끝, 배롱나무 그늘로 가자.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으니.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각나무꽃이여, 내가 못 보고 가더라도 / 허영숙 (0) | 2017.05.03 |
---|---|
날개 / 고정희 (0) | 2017.04.27 |
몸살로 누워 있다가 / 박우현 (0) | 2017.04.21 |
왕버들이 빨아들이는 나 / 손남숙 (0) | 2017.04.15 |
시 쓰기 / 백미혜 (0) | 2017.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