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에 갔네 / 한혜영
손목 잡아끌었던 것은 비였을까
모르겠네 날개 젖으며 옛집까지
날아간 이유를 모르겠네 깡마른
백일홍나무 한 그루 비 맞으며
달려 나와 손잡아 주었지만
다른 것들의 안부는 애써 묻지 않았네
새떼들 자작자작 껌 씹는 소리
떨어지는 전깃줄 아래 왜소병 앓는
소철과 눈 짧게 마주쳤을 뿐,
등 돌리자 옛집 그 커다란 둥치가
칭얼거리며 주춤주춤 따라 나섰네
안 돼……
마침 누에고치 같은 집안에 불
환하게 들어오고 새 주인이 된
여자 애벌레처럼 예쁘게 꼬물거렸네
차갑던 몸을 더듬어 빠르게 도는 피
금세 붉어지는 옛집의 볼을 톡
건들고 등 돌렸네 눈물 그렁그렁한
옛집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네
이때 홀연히 나를 빠져나가는 나비
한 마리 먼 후일 날개 지치도록 젖어
찾아왔을 때 깜빡 밝아지는 전구처럼
내 몸이 환해졌네 어느 날 문득
그리워서 찾아올 지구
우리의 행성이 눈물겹도록 따스했네
-『뱀 잡는 여자』,서정시학,2006.
* 애벌레는 자신을 보호해줄 고치를 스스로 짓지만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 집에서 오랫동안 더 많은 신세를 져야 한다. 애벌레가 번데기 시절을 견디며 고치를 녹이거나 찢으며 날개를 얻어가는 동안, 사람은 먼 데 유학하거나 새로운 살림을 내면서 집을 떠나게 된다. 그러니 때가 되어 집을 떠나는 것은 비슷하다고 하겠다.
나비가 옛집에 대한 기억으로 자신이 태어난 나뭇가지에 한 번씩 앉았다가 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은 집을 떠나와서 주인이 바뀌어 나갔어도 자신의 옛집에 대한 향수를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시인 역시, 꿈인 듯 현실인 듯 옛집 근처에 와 감상에 젖는다. 자신을 사로잡는 옛집의 기억들로 인해 결코 무심할 수 없어서다. “그렁그렁한” 눈물로 옛집과 마주하면서 자신 안에 갇혀 있던 “나비”가 빠져나가는 것도 느낀다.
어둠 속 주름 잡힌 번데기 시절처럼 옛집의 그림자도 길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옛집이 자신을 이만큼 성장하게 해주고, 따스한 피를 돌게 한 인연의 장이었음을 생각하는 것일 테다. 지난날을 따뜻하게 품는 것과 나비의 비상이 연결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인의 발상은 발랄하게 커져 나간다. 이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나비의 귀환 장소가 되는 아름다운 옛집이어야 한다는 거다.
시인의 상상을 빌리면 옛집은 모두의 보금자리다. 이 행성에 잠시 다녀가는 애벌레와 나비와 미래의 아이를 위해서 옛집에 폭약을 놓는 어리석음만은 피해야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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