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앵무의 비행지도 / 김경성
그는 하루 동안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화분에 뿌려놓은 해바라기와 귀리의 새싹이 그의 몸처럼 푸르다
해바라기 씨앗의 껍데기가 봄볕에 포슬거린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걸어 다니는 속도만큼 그도 따라와 주기를 바랐을 뿐
무엇을 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느린 걸음으로 걸을 때면 그도 느리게 걸었다
내가 두 손으로 보듬으며 그의 등에 입을 맞출 때면 발톱으로 내 손등을 할퀴었다
손등 위에 붉은 길을 긋는 것이 그가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길의 지도였음을
날개의 깃털을 자르고 난 후에서야 알았다
거실에서 쉼 없이 날아다니는 모란앵무 날개의 깃털을 잘랐다
천랑성에서부터 흘러온 길을 따라서 날아가고 싶었던
비행지도가 사라졌다
날지 못하고 새장 속에서 날갯짓을 할 때마다
우수수 길이 떨어진다
날개가 품고 있었던 길을 삼킨 모란앵무의 울음 속에
천랑성으로 가는 길이 있다
삐우욱 쓔우
찌으르륵
삐자자작작
쑤와락락
-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시인동네,2017.
* 해바라기 씨는 모란앵무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모란앵무를 길들이는 유혹이란 걸 모란앵무는 알고 있을까.
시에서 모란앵무에게 다가가는 시인의 마음은 한결같으나, 모란앵무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발톱으로 내 손등을 할퀴”면서 공격적 태도를 드러낸다. 이를 모란앵무의 단순한 보호 본능이나 우발적인 서운한 짓거리로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시인이 이해하고 짚어 주는 대목은 좀 더 깊고 원천적이다. “손등 위에 붉은 길을 긋는 것이” 곧, “그가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길의 지도였음”을 간파한 것이다.
자신에게 내민 먹이와 부드럽게 쓸어주는 누군가의 손이야말로 자신 안에 무한한 욕구와 가능성을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는 무의식적인 동요가 “손등 위에 붉은 길을 긋는” 행위로 나타났음을 이해하는 순간, 시인은 “날개의 깃털”을 자른 이전의 행동까지도 아프게 떠올리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선한 감정만 믿고 행하는 일이 상대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고, 기꺼운 마음으로 적응을 돕는다는 게 그만, 날개를 꺾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가 단순히 반려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그쳤다면 “그”라는 삼인칭을 굳이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사랑으로 포장하고 어떤 의심도 없이 사랑하는 이의 “비행지도”를 허물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주변부터 돌아보도록 하는 게 이 시의 힘이다.
마지막 의문이 하나 더 있다면, 모란앵무의 울음 속에, 하필이면 “천랑성으로 가는 길”을 떠올렸느냐는 거다. 천랑성은 거인 오리온과 함께 별자리가 된 큰개자리,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다. 동양에서는 한자 풀이 그대로 늑대별이라고도 한다. 자기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선 어둠 속 늑대 눈빛이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을 줄 안다.
시인 역시, 개성으로 충만한 시집을 엮으며, 온순하게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 정신과 울음을 틔워서라도 잃어버린 지도를 그리고 싶어 하는 마음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리라.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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