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자,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 푸른영토, 2017.
세계 구석구석을 다닌 여행 경험자의 여행 에세이다. “경험하지 못한 자는 경험한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그 경험에 근사치로 따라가는 의미는 있을 줄 안다.
“마음이 시키면 하는 거라고”.
크레타 섬을 여행할 때, 작가가 떠올린 조르바의 목소리다. 따지고 보면 여행도 마음이 몸을 움직인 거다. 그렇지만 작은 일에도 변하기 쉬운 게 마음인 것을 생각하면, 저자의 계속되는 여행기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처럼 여행을 망칠만 한 일을 피해 가는 여행 자세도 한몫했을 것이다.
릭샤꾼에게 속아 20분이면 갈 거리를 2시간을 소요하고 돈도 더 지불하게 되었다면 분한 마음이 남은 여행에 영향을 줄 법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릭샤를 타주어서 그 집 식구들이 밥을 굶지 않았을” 거라는 노인의 말을 인용하며, 그동안 친절한 사람에게 진 빚을 일부 갚은 거라고 돌려 생각한다. 환불해주지 않는 상한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버릴 때 그걸 날쌔게 채어가는 소년을 보며, “그 빵을 먹고 탈이라도 난다면 하는 생각조차 그 순간만큼은 사치였다”고 고백하며 굶주리는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아래의 기사(2017.09.29.<경인일보>)는 마치 이후의 장면 같지만, ‘천사의 다른 이름을 찾아서’란 제목으로 신문 연재를 앞두고 작가가 서두에 밝힌 내용이다.
“내가 첫 인도 여행에서 배운 건 ‘밥이 곧 경전이고 삶 그 자체라는 것, 현실에서 내가 느끼는 우울감이나 욕망은 과한 잉여 때문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일을 계기로 나의 밥 나누기는 조용히 세계오지로 뻗어나갔고 히말라야 아이들과 아프리카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처럼 나눔이 있는 여행은 여행을 더 풍요롭게 한다. 갔던 장소를 한 번 더 방문할 일이 생기면 작가는 이전에 찍은 사진을 인화해 가는 성의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에겐 내가 찍어준 사진이 생에 첫 사진이라는 것, 그리고 사진이야말로 자신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영혼의 거울로 믿기”에 보람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는 자체가 이미 선물 같기도 하다. 선물을 받은 사람 중, 말라위 원주민 레이첼도 있다. 사진 속 레이첼은 매력을 발산하는 아름다운 얼굴인데 사 년 만에 만난 레이첼은 생기를 잃은 아줌마로 변했단다. 그녀에 대한 남편의 애정이 식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레이첼을 돕고 싶지만 여행자가 나설 수 있는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레이첼은 레이첼의 몫을 감당해야 하고, 여행자는 또 그 인연에 기대 글과 사진을 남기지만 감당해야 자신의 몫이 따로 있을 것이다.
작가가 어느 사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낡은 문틈에 올라온 어린 싹을 위해 문의 기능을 포기하고 생명을 건사하기로 의견이 모였다니 생태적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상력이 지구공동체 모두의 것이라면 삶은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물론,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적이다. 꽃을 패며 문의 기능을 찾으려는 게 곧 현실이다. 다행히 작가는 상상이 실패하는 일 따윈 두렵지 않다고 어느 날의 메모에 남겨두었다. 그러니 정작 두려운 것은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다. 이쯤해서 여행의 의미는 경험에서 쌓이고 상상을 통해 확장되는 것이라고 대략 낙서해둔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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