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지지 않는 집 / 정동재

톰소여와허크 2017. 10. 19. 23:08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지지 않는 집 / 정동재


안방 빨래걸이에 적 벽돌색 줄무늬 요가 널려져 있다

양쪽 팔을 내리면 빨래걸이는 자줏빛 피라미드가 된다

한복 상자 보자기를 배꼽 치마처럼 두르면

아홉 살은 거울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로 변한다

피라미드 속으로 침입자의 발걸음이 들어서자

여기는 내 이집트야 들어오지 마! 한다

이집트가 뭐야?

여긴 내 사막이라고!

딸아이 건축은 해마다 바뀐다

다섯 살 때는 장롱에 들어가 집을 짓더니

일곱 살 때는 장롱 속 광장에서 종아리를 후려친

회초리를 향해 펑펑 울며 일인시위를 했다

여덟 살 때는 커피 타기 500원 물 떠오기 200원……. 메뉴판을 만들고

책을 쌓아 코너매장을 만들더니 닷새간 주인행세였다

사십 초입에 詩를 우주라며

늦은 밤까지 구도를 잡는 나와 무엇이 다를까

태양을 담은 눈과 바다를 담은 귀가 늘어간다

다 쓰러져가는 토담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는다


- 『하늘을 만들다』, 지혜, 2017.


   *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집은 어떤 모습일까.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머리에 스치는 생각 중에 하나는 도서관이다. 작고한 건축 기자 구본준은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의 첫머리에서 이진아도서관을 아름다운 집으로 소개한다. 죽은 딸을 추억하는 방법으로 아버지가 50억을 기부하고, 건축가의 설계를 거쳐 탄생한 집이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많은 아이들이 이진아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꿈을 가꾸어 갈 것이다.

구본준의 책에서 아버지가 딸을 위해 남긴 슬프고도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면, 위의 시에서는 딸아이의 동심으로 지은 집이 변화무쌍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인다. 빨래걸이의 날개를 접어 피라미드를 만들고 그 안에서 공주의 위엄을 뽐내기도 하고, 책을 쌓아 코너매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생활비를 버는 당찬 여성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딸아이의 집은 닷새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겠지만 추억 속에 남을 아름다운 집의 목록으로 손색이 없다.

여기에 시인은 자신이 만든 집도 슬쩍 얹어서 얘기하는데 딸아이 집에 조금도 질 마음이 없나 보다. 시인이 사랑에 빠진 집은 바로 시(詩)다. “늦은 밤까지 구도를 잡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언어로 집을 짓는 데 골똘해 있다. 짓고 부수는 행위가 딸아이의 그것보다 소리 없이 요란하긴 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 사막도 가고 우주도 유영한다는 점은 부녀가 서로 닮았다고 하겠다.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한 일이 여러 사람에게 꿈을 지어 주는 집으로 나타나는 것도 퍽이나 아름답지만,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집을 짓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서 크게 누리는 일이다. “다 쓰러져가는 토담집”은 돈이 세우는 거라고 정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존중하지만 그들에게 아름다운 집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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