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나는 누구인가 / 한상권

톰소여와허크 2017. 10. 24. 23:46



나는 누구인가 / 한상권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복기한다.

너는 내 목소리에 순정이 있다 말하지만

다른 이가 닦아놓은 길을 걷고 있을 뿐,

이 옷이 정말 내게 잘 어울리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보다

다른 이의 낯선 시선만 너무 쉽게 단정할 뿐이다.

한 번도 제대로 스스로를 그려보지 않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한바탕 진한 농을 한다.

새 책 소식과 어느 가수의 신곡 발표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의견을 내놓지만

그것은 정작 내 것이 아니라

어느 잡지의 말랑말랑한 서평과

롤랑 바케트와 TV 연예가 중계에서 그려놓은 길을

마치 내가 길을 내고 온 것처럼 깔깔댄다.


사무치고 사무쳐서 뿜어낸 질문은 무엇이 있는지

목소리가 떨려도 나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가 정말 나인 듯 내게 다가와서

고갱의 질문*에 다시 한 번 답해봐야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또박또박 되짚어봐야겠다.


* 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단디』, 시인동네, 2015.


* ‘거리에서’(동물원 1집ㆍ1988)는 김광석이 제목처럼 될까 봐 한동안 안 불렀다고 우스갯말도 던지던 노래다.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 곳으로/ 떠나버린 후”하고 열창하는 모습을 보면 감정을 실어서 그걸 전달하는 데 얼굴과 온몸의 근육을 다 쓴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평도 시인의 말처럼 이전의 누가 미리 언급한 말에 얼마간 영향을 받았을 성싶다.

어떤 것을 판단하고 수용하는 주체로서 ‘나’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상당 부분은 “다른 이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꼴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몸소 부딪쳐 깨지면서 배우는 삶이 소중하다고 말들 하지만 점차 조심성은 늘어가고 모험이란 것도 안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으로 스스로 고개를 꺾는다. 이쯤 되면 변해가는 자신을 의식하는 게 오히려 불편하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불편을 애써 사는 사람이다.

상식을 의심하고, 익숙한 길에서 비켜서는 걸 원한다. ‘거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기를, 세상을 깊이 앓기를, 자아를 굳게 벼리기를 꿈꾼다. 반대로, 주위를 의식해서 자신을 거기에 맞추어간다든지 내부의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는 것은 자아를 부정하는 일이다. “목소리가 떨려도” 자기감정을 속임 없이 나타내는 존재로의 각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일이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데서 노력의 필요가 있다.

앞의 김광석이 자기 안의 뜻을 밖으로 틔워서 소리쳤다면 고갱은 목소리 대신 붓으로 뜻을 형상화시켰다. 남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를 표현하는 게 예술의 기본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 과정에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거듭 묻고, 연하여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소리와 그림과 시와 삶을 더욱 웅숭깊게 해줄 걸로 믿는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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