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칫잠 / 이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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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혼자 사는
그 할머니
지난해까지 딸과 함께 살았다
암 걸린 딸과 더불어
이곳 청송 너구 마을로 돌아왔다
늙은 어미는
온갖 좋다는 약초를
산에서 몸소 캐다 달여 먹이곤 했다
그 약발 못 보고
딸은 기어이
어미보다 먼저 산으로 갔다
홀로 남은 어미는
늘 담배만 피게 되었다
유난히 밝던 지난 추석 보름날
할머니는 방문을 열고 앞산을 내다보며
죽은 딸이 땅속에서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을까 생각했다
아가 내 딸아
거기 땅속은 얼마나 춥니
그 차고 어둔 곳에만 웅크려 있지 말고
이따금 어미 곁을 다녀가거라
방문 살며시 열고 들어와
어미 다리 껴안고 발칫잠이라도 자고 가거라
할머니는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기어이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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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올레』, 모악,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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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진 사람에 대한 애정과 걱정으로 저승으로 쉬이 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살피고 혼잣말로 당부하면서 작별 인사를 대신하는 엄마의 혼령, 그 혼령의 어깨 밑을 추슬러 안아 주는 이가 있으니…… 바로, 엄마의 엄마라는 사람.”
이 구절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감상 소감을 짧게 메모해 둔 것이다. 소설 속 어머니는 죽어서도 얼마간 이승을 떠돈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이 결정될 때까지 49일쯤 걸린다고 하니, 그 시간을 빌려 여행을 다닌 거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라도 죽은 사람의 영이나 기운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별의 고통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지 싶다. 또한 아무리 슬퍼도 현실의 삶을 이어가야 할 테니 사십구재 이후에는 슬픔을 덜고 좀 더 가벼워져도 좋겠다는 의미도 깔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연이란 게 종종, 삶과 죽음을 경계 짓지 않고 넘나드는 경우도 있다. 소설의 경우도 그렇고, 시에서 소개한 사연도 그렇다. 먼저 죽은 딸과 이를 아프게 떠올리는 어머니의 인연도 삶과 죽음으로 나뉜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부정하는 쪽이다. 죽은 딸을 불러내서 발칫잠이라도 재우고 보내려는 마음이 뭉글하다.
사실, 발칫잠은 ‘남의 발이 닿는 쪽에서 불편하게 자는 잠’을 일컫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막내의 발치에 누웠다가 잠꼬대하는 아이의 발에 차여 눈에 불똥이 틘 적이 있다. 그래서 농(弄)을 하나 더 얹는다면 발치는 발치(拔齒)에 대한 두려움과 맞먹는 공간이다.
하지만, 누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은 힘이 세서 두려움도 쉽게 이긴다고, 생사도 예사로 넘나들게 된다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머리맡이든 발치든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곳이 얼마만한 위로가 될지는 불문가지 아닌가.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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