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전쟁놀이 / 김혜경

톰소여와허크 2017. 11. 27. 16:54


전쟁놀이 / 김혜경

 

 

내 칼을 받아라 두두득 드르륵

영락없이 내가 죽어야하는 대목이다

칼에 베여 죽어야 하나 드르륵 총에 맞아 죽어야 하나

어쨌거나 요란한 동작으로 장렬히 죽어주면 된다

이제 그만 죽고 싶은데 아들 녀석은

위생병을 소리쳐 부른다

 

또 살아나야 하고

총인지 칼인지에 맞아 또 장렬히 죽어야 한다

깔딱깔딱 죽어 넘어가는 연기는 내가 일품이다

가슴을 움켜쥐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다가

깨꾸닥 소리까지 내며 쓰러지면

아들 녀석은 신이 나 했다

 

요즘은 나는 가만히 있는데

땅이 뱅뱅 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비틀비틀 술 취한 연기를 잘도 한다

위생병을 소리쳐 부르던 아들 녀석은 119를 부르고

우리들의 전쟁놀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비꽃 듣는 소리, 주디자인, 2017.

 

 

* 놀이도 교육이다. 몬테소리 여사의 교육법이 그 시작인지 모르겠으나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고민과 실천은 이어지고 있다. 몬테소리는 정신 지체가 있는 아이가 도구를 가까이하고 만지작거리는 과정을 통해서 이전보다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과 함께 지능도 향상된 것에 주목했다. 여기에 그 아이에 대한 주변의 지지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여겨진다.

, 칼을 든 아이의 총질, 칼질에 맞서 장렬히 죽는 연기를 거듭하는 어머니는 몬테소리 교육을 실천하는 교육자와 다르지 않다. 아이는 칼이 부러지거나 놀이가 시들해지면 또 다른 놀이를 만들어서 어머니를 귀찮게 할 것인데(더러 어머니가 먼저 안내하기도 하겠지만), 바깥의 일과 누적된 피로로 인해 어머니의 짜증이 아이에게 전가되는 경우도 흔히 있다. 몬테소리 입장에서 보자면,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할 거냐는 말로 생산적인 놀이공부가 될 싹을 무지르는 셈이다.

위에 소개된 어머니는 스스로 일품연기라 칭할 만큼 놀이에 몰입하면서 아이의 동무가 되어주고자 한다. 설령, 공부는 둘째 치더라도 그 정서적 유대감이 아이가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갑작스런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놀이로 시작해서 전쟁놀이로 끝나지만 앞의 전쟁놀이는 연기요, 뒤의 전쟁놀이는 실제다.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아들 앞에 어머니는 예전의 빛나는 연기력을 잃어버리고 어지러움을 견디다 쓰러지고 만다. 실제 시인의 경험일 수도 있고, 한 번의 해프닝일 수도 있지만 이 세상 부모자식 간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해서 눈시울이 화끈해진다. 전쟁놀이가 이리 슬퍼도 되나.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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