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권태, 이상, 바둑 / 손종수

톰소여와허크 2017. 11. 22. 08:48


권태, 이상, 바둑 / 손종수

 

 

어떤 시인은 비의 한복판에서도 마른 독백을 한다’*는데 그는 그 안에서 바둑판과 흑과 백의 돌을 꺼낸다.

 

바둑은 참 이상하다.

 

이상의 연애편지를 보고나서야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맛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는 참 늦은 사람이라고, 바둑판 위의 그것이 꽃인지 별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우주요, 별이라 넓혀놓고 다시 화점(花點)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시인이 사막을 찾으러 누군가를 건너든 말든 이상이 연애편지를 맛나기 위해 후루사토를 쓰든 말든 그는 포기하였던 아침밥을 맛나기로 한다.

 

이것은 정석의 변화일까, 신수일까.

 

 

* 황종권 시인, 최정희에게 보낸 이상의 연애편지에서.

 

-『밥이 예수다, 북인, 2017.

 

 

* 1930년대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작가 중에 이상과 백석이 제일 앞에 있을 성싶다. 천하의 이상과 백석의 마음을 동시에 얻은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최정희다. 최정희와 김동환 부부의 딸인 김채원 소설가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들이 보낸 편지를 공개하면서 밝혀진 사실이다.

백석의 나타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여러 후보군이 있었지만 여기에 최정희가 단번에 유력한 후보가 된 셈이다. 이상도 최정희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라고. 마지막엔 <금년 마지막날 오후 다섯 시에 후루사토(故鄕)라는 집에서 맛나기로 합시다>라고.

시인의 생각은 번져 간다. 우연히 접한 시 구절에서 바둑을 떠올리고, 바둑에서 이상을 떠올리고, 이상에서 최정희에게 쓴 편지를 떠올리고, 다시 바둑을 생각한다. 얼핏 시간의 선후나 논리적 인과가 불분명한 가운데 시공을 넘나드는 차원의 언술로 묘한 긴장감을 준다.

화점은 바둑판 위에서도 제일 선호도가 높은, 그래서 꽃술을 그려놓기도 하는 꽃자리다. 누군 배꼽 자리라 하고 누군 별자리라 하기도 한다. 화점에서 우주로 통하는 상상력도 좋지만, 화점 자체가 인간사 꽃 피는 연애 자리란 생각을 할 법하다. 백석과 이상과 그들의 나타샤까지 연애감정으로 만날 때가 곧 맛날 때다. 다만, 그 연애가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이 깊어지고, 예술 작품의 밑천이 되는 경우가 적잖다.

그런데, 시인은 왜 제목에 권태를 가져왔을까. 연애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바둑으로 치면 돌의 방향을 잃을 때다. 우주를 유영하는 미아가 되어, 모든 게 귀찮아지는 권태에 빠질 것도 같다. 또한, 권태는 이상이 죽기 얼마 전에 썼던 득의의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연애도 바둑도 손쓸 틈 없이 무너질 때가 있다. 만날 일도, 맛날 일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애써 권태를 말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도 계기를 만들어 희망을 보고 밥을 먹어야 하는 게 생이다. 저마다 신수혹은 신의 한수에 미련을 놓지 못할 것이고,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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