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민, 『지금, 바로, 여기!』, 글상걸상, 2017.
황 시인은 카페 운영을 하면서 입간판을 내어놓고 그때그때의 시사, 일상의 발견을 자필로 꾸준히 게재했다. 입간판에 실린 글들이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그간의 입간판을 한 자리에 정리하고 모아낸 결과가 이 책이다. 간판 하나하나가 할 말 다하는 직설을 지향하되, 간결하고 압축적인 묘미를 살려 시로 읽어도 무방하다.
치열이 어긋나면
내 이빨만 아프지만
지금 치열하지 않으면
내 새끼가 아프다.
위 간판은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치열하게 살 것을 당부한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방향일 수도 있겠다. 잘못된 신념으로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데 남다른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면 그 자체로 딱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피해를 나누어 져야 하는 게 문제다.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방향은 “내 새끼가 아프”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방향이라면 대충 건성으로 할 게 아니라 “치열”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럼, 새끼 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는데, 다른 간판에서 운동의 방향을 찾아보자.
핵심 풀이를 하고
핵심 요점을 잘도 짚더니
핵 발전소엔 참 무덤덤하다
핵 발전의 핵심은
핵 위협을 발전시키는 것.
핵심 풀이를 하듯
핵심 요점을 짚듯
핵 문제를 사고하자.
핵을 뚫고 핵을 풀자.
핵교 안간 사람 모임
시인은 지역 초청 모임에서 현 정부가 밀고 있는 적폐 청산도 필요하지만, 적폐가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하지 않냐는 말을 했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려서 본질적인 데 힘을 더 써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어 소비를 줄여 방사능 섭취를 줄일 생각을 하면서도 방사능이 아예 누출되지 않도록 핵을 폐기하는 쪽으로는 동력이 모이지 않는다고 아쉬워한다. “핵 발전의 핵심은 / 핵 위협을 발전시키는 것”이란 핵심을 파악하고도 문제 풀이는 자꾸 변죽을 울리니 답답하다. 지금까지 누려온 지구 공동체의 삶을 후손에게 안전하게 물려주어야 할 텐데 학교 나온 사람들이 기존의 가치 즉, 경제적․군사적 이유로 핵을 신중하게 다루자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단도직입의 글이 “핵교 안간 사람 모임”의 입장 표명이라니! 시인은 딱딱한 주장으로 흐르기보다는 유머러스한 마무리로 공감대를 넓히는 것인데 이런 유머도 핵을 포기하지 못하는“핵교”에 맞서 “핵교 안간 사람”의 자유로운 목소리와 운동성을 절감한 데서 비롯한다. 그 운동이 더 세져서 균형을 이루는 정도를 넘어 현실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입간판은 입을 벌리고 전하려 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작곡으로 선보이는 재주도 있다. 그런 재주에 대해서 언급한 입간판도 눈에 띈다.
뭔가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뭐든 안 하는 게 많은 사람이고,
뭔가를 잘 못하는 사람을 보면
뭐든 하는 게 많은 사람이다.
재능은 무얼 많이 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뭔가를 안 하는 데서 나온다.
안 하는 게 많아야
하나는 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익숙한 시각으로 보면, 이 간판을 두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자신의 상품성을 높여서 경쟁력을 갖추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 반대쪽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를 성취하려는 욕망, 그 욕망이 자본주의 체제로 스스로를 편입시켜 버린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삶,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삶, 돈이 없으면 많이 불편해지는 삶에 갇혀서 자아도 잃고 여유도 잃고 시간도 잃기 십상이다. 여기서 빠져나오는 길은 시인의 말대로 “뭔가를 안 하는 데서”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이윤과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서 개성을 갖고, 여유로운 시간 속에 남을 돌아보면서 지금보다 더 심심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다. 심심해서 책도 읽고, 심심해서 악기도 다루고, 심심해서 자연을 살피는 삶이 진짜 깊어지는 삶이 아닐까 싶다. (이동훈)
'감상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 (0) | 2017.12.12 |
---|---|
<소설> 초가집이 있던 마을 (0) | 2017.12.09 |
<에세이> 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 (0) | 2017.12.03 |
<에세이> 무서록 (0) | 2017.11.25 |
<에세이> 엄마의 마음 편지 (0) | 2017.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