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무서록

톰소여와허크 2017. 11. 25. 12:27




이태준, 『무서록』, 깊은샘, 1994.

- 책의 앞부분은 『무서록』(박문서관, 1944)을, 뒷부분은 다른 잡지에 실렸던 이태준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10살 이전에 고아가 되어 독학으로 공부하던 시절의 풍경부터 해서 소설가로 명망을 얻으면서 성북동에 집을 장만하고 고서화와 나무와 파초, 수선 등에 마음을 기울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작품애」(作品愛)의 일화는 이태준이 글 한 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재봉한 것을 잃어버리고 서럽게 우는 여학생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잡지사에 보낸 자신의 작품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다시 쓰게 된 찜찜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소녀처럼 울지 못한 이유를 “그 작품들에게 울 만치 애착, 혹은 충실하지 못한 때문이라 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뒤이어, “잃어버리면 울지 않고는,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작품을 써야 옳을 것이다”라고 마무리하는 모습에서 글쟁이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성북동 집 마당에서 앵두, 대추, 감을 얻을 수 있는 걸 큰 복으로 알면서도 이태준이 아쉬워했던 것은 큰 나무의 존재였다.

“나무는 클수록 좋다. 그리고 늙을수록 좋다. 잔가지에 꽃이 피거나, 열매가 열어 휘어짐에 그 한두 번 바라볼 만한 아취를 모름이 아니로되, 그렇게 내가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나무보다는 나무 그것이 나를, 내 집과 마당까지를 푹 덮어주며 나로 하여금 한 어린아이와 같이 뚱그래진 눈으로, 늘 내 자신의 너무나 작음을 살피며 겸손히 그 밑을 거닐 수 있는, 한 묏부리처럼 높이 솟은 나무가 그리운 것이다.”(「수목」에서)

고목에서 위로받는 모습에서 얼핏, 일찍 고아가 된 이태준의 외로운 심사가 투영되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윗동네에 오래된 감나무가 좋아 집을 덜컥 사서 와 버렸다는 『근원수필』의 저자 김용준을 의식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태준은 김용준의 집에 늙은 감나무집이란 ‘노시산방’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한다. 아버지 유품인 천도형(복숭아 형태) 연적을 귀하게 여기는 이태준이나, 못 생긴 두꺼비 연적을 책상에 두고 매일 눈 맞추는 즐거움을 이야기한 김용준이나 동갑내기 두 사람은 글도 취미도 꽤 닮았다.

다만, 이태준은 고서적이나 예술품을 소장만 하려는 태도는 경계한다.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픔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古物) 그것이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고완품(古翫品)과 생활」중)라고 했으니, 좋은 것도 공부를 통해서 가치를 알아보거나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의 몫일 테다. 이태준이 가치를 둔 꼭대기에 책이 있다.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책」중)로 시작되는 글에서, “冊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라고 덤덤한 이태준의 입이 모처럼 버터 향을 낸다. “서점에서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 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차길이 멀수록 복되다”는 구절에서 책을 읽기 위해 출근길이 먼 데로 이사 했다는 예전의 농담이 생각나기도 한다. 책은 冊처럼 펼쳐야 하는데, 지하철에선 휴대폰에 밀리고, 잠자리에선 펼치면 바로 졸게 되니 반성록 대신 어쭙잖은 감상으로 면치레라도 해보는 게다.

서울에 용케 남아준 이태준의 수연산방에 갔다 온 적이 있다. 그 위 어디쯤에 있을 노시산방의 행방도 살펴서 야단스럽지 않게 복원해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이태준도 김용준도 피해가지 않았다. 수연산방에서 찍었을 이태준의 가족사진을 무서록 옆에 둬 본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