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어머님 전(前) 상서(上書) / 김규동

톰소여와허크 2018. 1. 31. 15:00




어머님 전(前) 상서(上書) / 김규동

솔개 한 마리
나지막이 상공을 돌거든
어린 날의 모습같이
그가 지금
조그맣게 어딘가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움직이는 그림자는
영원에 가려
돌아오지 않지만
달빛에 묻어서라도
그 목소리는 돌아오는 것이라
여겨주세요

이제 생각하면
운명이라고 잊혀도지건만
겨레의 허리에 감긴 사슬
너무나 무거우니
아직도 우리들은
조그맣게 조그맣게
걸어가고만 있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닿지 못하는
서투른 이 발걸음
죽은 자와 더불어 헤매어 봅니다

솔개 한 마리
빈 하늘을 돌거든
차가운 흙 속에서라도
어여삐 웃어주세요.

- 『하나의 세상』,자유문학사,1987.

* 김규동 시인의 고향은 함경도 경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종성군 행영읍이다. 경성으로 표기되는 이유는 이렇다. “회령에서 육십 리 길, 하루 한 번 떠나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 한다. 이곳은 워낙 파묻힌 시골이라 나는 지금껏 기회가 있어 고향을 이야기할 때는 청소년기에 학교를 다녔던 경성이란 곳을 고향처럼 이야기해왔는데, 대개의 경우 북(北) 경성이라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도 종성 혹은 행영이라면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는 탓에”(『시인의 빈 손』1994)그냥 경성이라고 말해 왔다는 거다. 경성고보에서 김규동을 가르쳤던 김기림은 인근의 성진군 출신이이고, 김동환과 이용악 시인의 고향도 경성으로 알려져 있다. 
언젠가 김기림 시인의 가족사진을 보고, 그의 월북 후 서울 가족의 행방이 궁금했는데 김규동의 산문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지금 은평구 증산동에는 선생 가족이 살고 있거니와, 사모님 김원자 여사는 노령에도 기력을 잃지 않고 그분의 무사귀환을 고대하다 최근 작고했다”고. 김동환 역시, 남쪽에 아내 최정희와 두 딸을 남겨두고 월북한다. 이용악도 뒤를 따르나 혼자 몸이었으니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북으로 향했을 것이다. 
 이후 김규동은 북쪽의 부모와 누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고, 김동환과 김기림도 남쪽의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전쟁 자체도 비극이지만 동시에 더 큰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에 그어둔 선 하나로 인해 남북으로 불과 몇 시간 거리에 떨어져있는 부모자식이 죽을 때까지 그 선을 넘지 못하고 속만 태우는 거짓말 같은 세상이라니! 외세 때문인지, 독재 권력 때문인지, 다수의 무관심 때문인지 불안만 조성하고 이해관계만 셈하다가 분단 70년을 향해 가고 있다. 
“겨레의 허리에 감긴 사슬/ 너무나 무거우니” 개인으로선 “아무리 애써도 닿지 못하는” 세월이었다. 운명인가 하면서도 조그마한 몸으로 “조그맣게” 한 걸음 내딛으려고 하는 현실이 자못 슬프다. 시를 쓸 당시에 이미 헤어진 지 40년이 지났으니, 어머니의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고 다가올 미래에 희망을 걸기도 어려웠던 시인은 고향 마을에 흔했던 솔개가 되어 어머니께 가려 한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이지만 시인의 바람대로 어머니 무덤이라도 원 없이 돌았기를 바랄 뿐이다. 
시인의 산문, 『시인의 빈 손』에 나오는 어머니에 대한 글을 붙인다. 
“밤늦게까지 내가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내 동무를 해준다고 바늘귀를 잘 끼지 못하는 어두운 눈으로 늦도록 바느질을 하였다.
이러던 어머니를 남겨두고 남으로 나온 지 40여 년, 나는 지금껏 어머님의 생사여부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 이러한 불효가 또 어디 있으랴. 이런 뜻에서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분단세월이 이처럼 길어질 줄 어찌 상상이나 하였으랴. 외세에 묶인 40여 년 세월이 다만 억울하고 처량할 따름이다.
나는 평소에 집아이들한테 효도를 하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는 일이 없다. 아무리 효도를 하고 싶어도 나 자신 북녘에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 아무런 효도도 할 수 없는 것이니, 아이들에게 효도 운운할 자격이 없는 몸인 것이다.
분단은 인륜마저 거세했으며, 사람이 사람으로서 응당해야 할 도리를 빼앗아갔다.
어머니, 지금 당신께서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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