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한 은빛 연못 / 임보
한 아파트 폐품 쓰레기 더미에서
임보의 시집 『추락한 은빛 연못』을 주웠다며
자랑삼아 어떤 이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그 시집이 태어난 해가 1994년이니
20년 동안 거친 세상 떠돌다 거기에 표류했으리
보나마나 표지는 헐고 활자는 퇴색되어
아마도 만신창이 남루의 행색이리라
어느 선비의 서가에 가까스로 끼어 지내다
주인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축출된 걸까?
아니면 어느 숙녀의 혼수에 묻어 왔다가
놓일 자리가 없어 버림을 받은 것일까?
·········어느 추운 겨울 밤,
철새들이 잠자던 연못이 그만 얼어붙고 말았지,
새들이 다 얼어 죽고 말았을 거라고?
천만에, 다음날 철새들은 발목에 은빛 연못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는-‘날아가는 은빛 연못’
은빛 연못을 매달고 날아가던 그 시집이
발에 매달린 세상이 너무 힘겨워
그만 아파트 쓰레기장에 추락하고 말았나 보다
그래도 아직은 거두어 갈 이가 있다니
시를 쓰는 마음이 덜 외롭기는 하다
- 『벽오동 심은 까닭』, 시학, 2017.
* ‘날아가는 은빛 연못’은 시집 제목이면서, 시집 서문에 쓴 동화다. 위 시에도 인용되어 있지만 서문 내용을 표 안 나게 줄인 걸로 보인다.
“폐품 쓰레기 더미”에서 시집을 구한 사연을 인터넷에 올린 이는 최병무 시인이다. 시 읽는 모임을 함께하던 남대희 시인이 가방에서 그 시집을 꺼내며, 아파트 분리수거장 책 더미에서 구출해왔다고, 대단한 횡재를 한 것처럼 득의의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최병무 시인도 발품을 팔아도 살 수 없는 책을 얻었다고 공감하면서도 “우리의 시선(詩仙)께서 한겨울 추방을 당하신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흥을 낸다.
임보 시인과 인연이 있는 데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귀한 책이,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소용없는 책이 되어 밖으로 내쳐지기도 한다. “2015년 연말 현재 시집 경매가// 1948년 간행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300만 원/ 1935년 간행의 『사슴』이 7,000만원/ 1925년 간행의 『진달래꽃』이 9,000만 원// 내 시집도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봤더니// 1975년 간행의 『임보의 시들<59-74>』/ 겨우 3만 5천 원// (시간이 돈이다!)//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시집 경매가』전문)며 시간의 힘을 믿기로 한 임보 시인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닐지 몰라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최병무 시인이나 남대희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서로 모시고 싶은 책이 되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소월의 『진달래꽃』초간본이 1억을 호가하는 시대지만 가치를 몰라보는 사람에겐 한 줌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는 것도 정한 이치다.
『날아가는 은빛 연못』이 궁금해서 검색하니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다. 중고 책 검색에도 뜨지 않는다. 철새가 “발목에 은빛 연못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시집이 꽉 차 있을 것도 같다. “발에 매달린 세상이 너무 힘겨워/
그만 아파트 쓰레기장에 추락하고 말았나 보다”는 현실을 환기하는 또 다른 시적 상상력이다. 발에 매달린 삶의 무게로 휘청이다가 더러 곤두박기도 하면서, 발목 잡힌 현실보다 다시 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더 절망이라면, 현실을 통째로 들고 나는 철새의 비상은 큰 위로가 된다.
상상의 힘은 현실을 이기게 하고, 그 힘은 시집 속에도 분명 있다. 몇몇 시집이 주목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전만큼 공전의 히트를 치는 건 드문 일이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뜨거나 안 뜨거나, 나중에 뜨거나 나중에도 안 뜨거나 이렇게만 시집의 운명을 점치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다. 시집 한 권이, 시 한 편이 고단한 삶을 껴안으며 새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는 마술적 힘이 있다고, 그걸 발견하는 건 독자의 몫이라고 적어둔다.
앞서 『날아가는 은빛 연못』을 구출한 장본인은 남대희 시인이라고 했다. 그의 시집에서 관련 이야기를 발견했을 때 나 혼자 퍽이나 즐거웠다.
흰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시집을 읽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연못에 발 담그고 잠들었던 철새들이
아침, 꽁꽁 얼어붙은 연못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간 은빛 푸른 연못
그 연못이 쏟아져
하얀 눈꽃으로 다시 내리는 것을 봅니다
나뭇가지마다
송사리 떼 소복소복 매달려
반짝반짝 비늘을 세우고
거리로 나온 연인들 머리 위엔
새하얀 연꽃으로 피어나고
뛰노는 아이들 등 위에는
힘찬 잉어로 퍼덕입니다
세상이 온통 은빛 연못이 됩니다
시인이 날려 보낸
은빛 연못은
한 잎 한 잎 눈꽃으로 다시 피고
다시 시(詩)가 되어
또 다른 시인의 가슴을 매달고
창공을 납니다
- 남대희,「겨울 창가에서」전문 (『나무의 속도』,도서출판 움,2015)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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